MZ 세대는 없다

 민순기 (봄날)


  글쓴이 소개 : 기자와 홍보인을 자처하며 살았던 시간보다 비로소 문탁에서 공부한 시간이 길어진 것을 행복해하며 고전공부의 맛을 즐겁게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아젠다>의 대선 연재글을 붙여서 읽었다. 그렇게 읽게 된 것에는 다분히 의도가 있었다. 당장 눈앞에 <봄날의 살롱>이라는 토론 프로그램이 닥쳤고, 진행을 맡은 나는 대선에 대해서도, 그리고 평소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도 무감했다. 이 상황을 넘어가기 위해 세 청년의 글은 소재로 쓰기 안성맞춤이었다. 처음부터 그럴 작정은 아니었다. 살롱의 주제였던 ‘대선’이 너무 범위가 넓으니 주제를 한정해보자고 했고,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친구들이 궁금해 하는 이른 바 한국사회의 2,30대, MZ세대에 대한 이해의 계기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아젠다>의 대선 연재글은 MZ세대의 존재를 ‘확인’하는 글이어야 했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MZ세대는 없다. 적어도 내가 의도한 대로 그룹 지어져야 할 MZ세대는 없었다. 그들은 2022년 안개 같은 정국 속의 20대, 30대 청년 중 한 명일뿐이었다. 대선과 관련해서도 그들의 생각은 세 갈래 길로 나뉘었다. 이들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20대, 30대 시절에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나 돌아보게 된 것이 소득이라면 소득이겠다. 당시 나는 그저 학교와 집, 아르바이트하는 곳을 오가며 시시한 대학생활을 보냈고, 기자의식 없이 신문사 문을 두드렸다. 별로 힘들지 않게 ‘언론인’의 길을 걸으면서, 뜨거웠던 86년, 87년 화이트칼라들의 ‘저항’을 뉴스로만 접했다. 나는 80년대 젊은이를 살았으면서 권력에 맞서 짱돌을 들었던 사람들과는 한참 먼 길을 걸었다. 그 와중에 정치는 내 삶의 저편에 있는 ‘풍경’같은 것이었다. 오히려 40대에 들어서면서 나는 내 삶이 그저 독자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엮이는 것이고, 그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하나씩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조금씩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조금씩 사람들과 만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젠다>의 청년들은 이미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글을 읽으면서 때로는 깊이 공감이 가기도 하고 고개가 갸우뚱거리기도 하지만, 최소한 정치와 선거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는 허무했던 나의 20대, 30대와 비교된다.

  우선 지원의 글에서 인용한 히토 슈타이얼의 “진지함을 향한 욕구는 점차적으로 강렬함을 향한 욕구로 대체되었다”는 말에 크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팩트를 알기 위한 하나의 제시는 어느 새,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극단적인 감정과 또 다른 갈등의 선으로 바뀌어 버린다. 이제 실제와는 거리가 멀어진 이슈가 더욱 강렬한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가 버리는 예가 허다하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젠더갈등’도 이처럼 강렬한 감각만이 들끓는 작금의 다양한 미디어 채널 속에서 증폭된 결과 아닐까. ‘여자들도 징병제 해야 된다’ ‘군인월급 백 만원 시대’ ‘이대남’ ‘이대녀’ 등등, 나도 듣고 있지만 뭔가 내가 피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하물며 해당 세대들에게야 얼마나 강렬한 자극일까. ‘여성가족부 해체’라는 공약이 그렇게 많은 20대들의 극단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지원의 글은 이런 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주었고, 이 변화하는 시대에 여전히 기획의 여지가 있음을 보여준 점에서 모종의 희망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대선을 바라보는 명식의 글에서 ‘선거’라는 제도에 대한 색다른 시각을 읽을 수 있었다. 선거라는 제도 자체가 가진 남루함이라고 할까, 변화를 거듭하는 시대의 요구를 채울 수 없는 낡은 그릇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한다. 현재의 선거판이 진보-보수라는 프레임으로 읽어낼 수 없는 것처럼, 이미 시대는 변하고 있는데 사회를 움직이는 도구는 그것을 담아낼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의 그의 정치적 실천을 중단한다고 했다. 오히려 큰 선을 바라며 행해오던 자신의 정치적 행위가 본연의 목적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쪽으로 작동하는 것을 알아버렸다고 했다. 며칠 사이 문탁 2층 친구들과 공유했던 글을 생각나게 한다.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31571.html) 어떻게 보면 새로운 정치는 낡고 오래된 정치의 관행이 완전히 무너진 후에 세워질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그의 판단은 하나의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나의 생각은? 아직까지는 나의 한 표를 행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아직 날이 많았으니 바뀔 수도 있겠다. 

  위의 두 청년과 조금 더 나이적으로 거리가 먼 우현의 글은 나에게 약간 난해했다. 일단 쓰는 용어나 그가 몸담는 커뮤니티 등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MZ세대는 없지만 세대 차이는 인정해야 한다. 그가 보여준 대선정국의 20대는 ‘젠더-팬덤 싸움’의 장이다. 나는 읽는 내내 ‘정말?’ ‘이게 뭐지?’ ‘헐~’ 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이유로 그는 자신의 희망을 따라 선거에 참여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투표보다 중요한 건 스스로 어떤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인지다”라고 멋지게 말했다. 어떻게 보면 내가 선거에 임해서 들었던 생각과 가장 근사하게 접근한 것이 우현의 이 말이기도 하다.

  


  대선이라는 이슈를 <아젠다>를 통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관심도 없었던 주제를 쓰느라 머리를 싸맸을 청년들에게 감사한다. 빈 말이 아니라, 이렇게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각자의 관심 영역을 뛰어넘어 함께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그동안 <아젠다>의 날라리 구독자였음을 고백하며, 앞으로의 연재글을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