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의 종말
차명식 (길드다)
보다 큰 선을 위한 투표
돌이켜보면 내게 선거권이 생긴 이후로 나는 지금까지 선거에서 크게 고민을 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매 선거마다 내게는 당연히 찍어야 할 당과 후보들이 있었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도 최소한 당연히 찍지 말아야 할 당과 후보들이 있었다. 그것은 딱히 후보의 공약이나 약력을 샅샅이 훑지 않더라도, 선거판마다 쏟아지기 마련인 뉴스의 홍수에서 허우적거리지 않더라도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내게 있어 선거란 인물이나 당에 대한지지 이전에 내가 지지하는 가치 - 선善을 증명하고 확인받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더 훌륭한 선, 이 사회를 위한 공동의 선이 무엇인지는 내게 항상 명확했기 때문이며, 자연히 어디에 표를 던지는 것이 ‘옳은’ 일인가도 항상 분명해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와 같은 사람이 나뿐이 아니리라 확신한다. 역사를 보아도 보다 큰 선을 향한 지향은 각 개인들의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여러 사람들의 협력과 공동행동을 이끌어내며 사회 변혁의 동력으로 작용해왔다. 이는 몇몇 사가들이 근대 이후 한국 사회의 역동적인 변화를 설명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들은 한 개인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충성으로 여겼던 일본의 ‘무사도’와 군주의 뜻을 거스르는 한이 있더라도 더 큰 선으로 군주를 이끄는 것이야말로 충성이라 여겼던 조선의 ‘선비정신’의 차이를 논하면서 언제나 더 큰 선을 향해 ‘일치단결’했던 한국사의 궤적을 그려낸다. 일제강점기에 그 더 큰 선이란 일본제국이란 열강에 대한 투쟁과 민족의 독립이었다. 해방 이후 한국전쟁부터 분단기에는 경제 발전과 자유세계의 수호가 있었다. 20세기 중후반에 이르러서는 민주주의와 인권을 향한 열망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그리고 이 공동선들은 각 시기의 ‘가장 큰’ 선으로서 다른 가치들보다 우선하여 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였으며 그 자체로 하나의 정체성이 되어 정치세력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 우파와 좌파의 대립은 각 시대를 지배하며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숭상 받았던 거대한 공동선들의 대립이자, 그 각 공동선의 시대를 향유하며 그 실천을 미덕으로 삼았던 집단들의 대립을 의미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특히 반공으로서의 ‘자유’와 특히 자유를 부르짖으며 독재정을 구축했던 세력에 대한 항거로서의 ‘민주주의’의 대립이었다. 민주화운동의 승리로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이후 김대중과 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민주주의’ 세력이 한동안 정권을 잡았지만 그동안에도 ‘자유’ 세력은 여전히 자신들의 영역을 공고히 가지고 있었다. 그 이후 이 대립구도는 박근혜 정권과 문재인 정권이 연달아 차례로 들어서면서 박정희와 노무현이라는 양 세력의 아이콘들을 상기시키며 최근까지도 계속해서 생명력을 가지고 유지되었다.
다시 나 개인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나는 그 두 개의 ‘공동선’ 중 ‘민주주의’ 쪽을 오랜 기간 훨씬 친숙하게 여겨왔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내 주변에는 민주화운동의 최전선에 섰던 어른들이 많았고, 그들의 생애사와 그를 교보재로 한 수업들을 접할 기회도 많았다. 더하여 내가 그 시기의 ‘민주주의’를 인권 개념을 경유함으로써 여러 소수자 운동을 비롯한 다양한 ‘진보적 가치’를 한데 응집시킨 덩어리처럼 인식한 탓도 있었다. 나는 민주당과 노동 계열 정당에 표를 던지는 그 하나의 행위를 통해 대단히 광범위한 사회적 가치들에 동시적인 지지를 표하고 실천하는 기쁨을 맛보았다. 그는 곧 독재정권의 향수에 대한 반발이자 신자유주의에 대한 항거였고, 청년과 여성과 성소수자와 장애인과 외국인노동자와 기타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과의 연대였다. 그것은 참으로 간편하면서도 대단한 일이었다.
전통의 종언
하지만 마침내 오늘에 이르러 그 뿌리 깊은 대립의 구도는 거의 완전히 붕괴하였다. 박정희의 후계자였던 박근혜가 몰락했고 노무현의 후계자인 문재인도 그들 ‘민주주의’의 추종자들이 부르짖던 가치들을 스스로 훼손하며 명백한 한계를 드러낸 가운데 각 당이 선출한 두 명의 대선후보는 -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 그들의 지난 행보와 삶의 궤적을 보아도 현재의 공약과 메시지를 보아도 기존의 거대한 공동선들을 대변하지 못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 문재인 정권의 투사로 박근혜 몰락의 일각을 담당했던 윤석열이 단지 몇몇 건수들에서 문재인에게 반기를 들었단 이유만으로 ‘자유’의 기수로 추앙받는 현실, 또 ‘민주주의자’ 이재명이 수많은 아젠다들에 대해 소위 진보적인 포지션을 취하는 듯 보이면서도 여론에 따라서는 손바닥처럼 자기 의견을 뒤집으며 노골적으로 표를 지키려하는 태도를 보이는 현실은 얼핏 지난 전통적 대립들의 연장선상에 있어 보이는 듯한 이 구도가 실은 완전히 그 맥락들을 상실하고 표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그 지지자들이 양쪽 후보 친지들의 스캔들에 일희일비하거나 황색언론과 유투버들이 열을 올려 보도하는 작은 사건들마다 상대를 폄하하고 아군을 옹호하며 ‘내로남불’을 거듭하는 모습은 정당 뿐 아니라 그들 지지자들 역시도 본디 그들이 갖고 있던 맥락에서 유리되었음을 확인하도록 한다. 그들은 이미 무의미한 빈 껍질이 된 각 당의 이름에 집착해 관성적인 지지를 이어감으로써 자신들이 추구해 온 ‘가치’를 확인받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면에서, 이번 대선은 적어도 십 수 년 전부터 그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 정국이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핀치에 부딪힌 결과이다. 거대한 공동선들의 계보가 끊기고 그로부터 튕겨져 나간 정치적 고아들의 생존경쟁이다.
2016년 박근혜 정권 당시 검열을 막고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겠다며 테러방지법에 저항해 약 여드레 간 필리버스터를 이어간 민주당은 그들이 집권한 후 유해사이트 차단을 명목으로 또 다른 검열 방지법을 통과시켰다. 구태정치에 항거해 새로운 지대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내겠다며 서울시장에 출마했던 신지애가 국민의 힘에 입당해 적극적으로 그들을 옹호하고, 거기서 또 오래 지나지 않아 팽당한 다음에는 다시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어 원래하던 대로 그들을 비난한다. 더 이상 쓴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오히려 상식을 뒤흔들어 우리를 공황으로 몰아넣는 일종의 코즈믹 호러cosmic horror를 불러일으키는 상황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연달아 벌어진다. 모든 지대가 무너지고 뒤섞인 가운데 여기에는 오직 목성의 표면과도 같이 굽이치며 혼란스러운 풍경만이 있다. 통시적으로 이어져 온 맥락들과 공시적으로 사회를 관통하는 거대 선의 담론이 상실됨으로써 우리는 발 디딜 땅을 잃었다. 우리는 단지 가스의 바다 속으로 끊임없이 추락한다. 이미 리얼리티 쇼가 되어버린 대선을 몽롱하게 시청하면서.
선택의 중단
물론 그 가스 속에서 유영을 하며 필사적으로 다시 디딜 땅을 헤매는 자들도 있다. 어떤 이들은 이 혼란 속에서 어떻게든 연결고리들을 찾아내어 맥락들을 다시 이으려 애를 쓴다. 예를 들어 ‘이대남’을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포착하고, 그들의 ‘보수화’를 설명해줄 수 있는 고리를 찾는 식이다. 그들은 그런 설명을 통해 이전의 것에서 다소 변주된 형태로라도 잃어버린 ‘질서’를 규명해 회복하려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또 어떤 이들은 이 시대의 새로운 시대정신, ‘자유’와 ‘민주주의’를 이어 사회의 아젠다가 될 새로운 공동선을 찾아내려 애쓴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러한 욕망을 투영한 제 3지대의 후보를 지지하거나 혹은 직접 정치세력을 조직해 자신들이야말로 그런 공동선을 만들어낼 적임자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어떤 이들은 그저 이 상황에 절망하여 모든 것을 냉소하며 유희거리로 삼기도 한다. 물론 한 사람에서 이와 같은 여러 태도들이 섞여 나타나는 것도 드물지 않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들이 실제 유의미한 성과로 이어지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오늘날 사람들은 각기 다분화된 정체성을 참호로 삼아 파고들어 저마다의 전쟁을 벌이고 있고 전통적 거대 공동체들은 녹아내려 유동적이고 액체적인 관계들로 변화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선이라는 거대 담론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운동들은 결코 되살아날 수 없다. 게다가 설사 가능하다 해도 과연 그 회귀가 바람직한 것인가는 불명확하다. ‘자유’는 물론이고 ‘민주주의’ 역시도 ‘보다 큰 선’을 위한 당위의 이름 아래 그 안의 수많은 아우성들을 묵살하여 왔음이 차차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그 묵살이 희생이었을지 몰라도 오늘날에는 위선이 되었으며 동시에 공동선의 운동을 무너뜨리고 있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이자 공동선의 운동을 재조직하지 말아야 할 가장 큰 이유가 되었다. 즉 -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갈 이유도 없음을.
그러므로 나는 투표를 중단한다. 그들 공동선의 계보가 오래 전 끊겼고 남은 것은 껍데기와 이름뿐임을 이제 알기 때문이다. ‘보다 큰 선’을 찾기 위한 선택이 실은 또 다른 가치들을 더 작은 것으로, 잠시 배제해야 할 것으로 만드는 것임을 이제 알기 때문이다. 공동선의 이름과 그 아래의 일치단결이 매 순간들의 보다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결들을 뭉그러뜨린 결과임을 이제 알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알아차린 이가 나만이 아님을 확신하며, 그는 더 이상 공동선의 이름 아래 전체가 단결하는 전통적인 방식의 변화는 불가함을 뜻한다. 코로나가 세계를 휩쓸고 새로운 대전의 불씨가 타오르며 온난화가 가져올 종언이 20년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이것을 타개할 활로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그것은 다수결에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함께 해야 할 일들은 분명히 존재하나 적어도 그 함께의 방식이 ‘하나 되는 것’은 아님을 -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했고 이루어진 적도 없었음을 우리는 이제 받아들일 필요가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