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이 남긴 자국 - 밀양·청도 송전탑 반대 투쟁 온라인 기록관 개관식 리뷰
고은 (길드다)
12월 중순에 밀양 765㎸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의 어진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는 일 년에 한두 번 연락을 주고받는다. 사적인 대화는 거의 없이 밀양에 관련된 이야기만 나눈다. 업무 대화이지만, 어진에게 오는 연락이 반갑다. 서로 어떻게 지내는지 잘 모르지만, 어진에게 친밀감을 느낀다. 물론 어진에게만 그런 것은 아니다. 밀양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오는 연락은 내용이 어떻든 그저 반갑다. 이번에 어진은 줌(zoom, 화상 회의 서비스) 사용 방법이 궁금하다고 했다. 길드다에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시작되었을 때부터 줌을 사용해 소규모 세미나와 대규모 행사를 열어왔다. 우리에겐 부득이했던 선택이었는데 이렇게 도움이 되다니! 이러려고 내가 줌을 썼구나(?).
어진은 사람들과 <밀양·청도 송전탑 반대 투쟁 온라인 기록관>의 온라인 개관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원래 오프라인에서 개관식을 열 예정이었는데 코로나 상황이 좋지 않아 온라인으로 바꿨다고 했다. 개관식이 온라인으로 바뀐 것은 무척 아쉬웠지만, 나는 어진의 질문에 그럭저럭 대답했다. 어진은 화면 고정은 어떻게 하는지, 추천과 핀은 어떻게 다른지, 다른 사용자 소리 컨트롤은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 물어봤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어진의 질문에 들으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묻지도 않은 것에 대해서까지 자료를 찾아보며 정리해 보내주었다.
개관식에는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 최대 동시 접속자는 70명을 넘었고, 한 화면에 여러 명이 들어가 있기도 했으니 적어도 100명은 함께 했을 것이다. 거의 1~2년 만에 보는 할머니와 주민분들, 활동가들, 연대자 분들이 너무 반가웠다. 눈물, 콧물이 대책 없이 줄줄 흘렀으나, 그땐 내가 왜 우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걸핏하면 진행의 흐름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틀기로 했던 영상의 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파워포인트로 발표하기로 했던 분의 인터넷 접속이 원활하지 않아 발표가 무산되었다. 분명 정해진 순서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대신 땀을 뻘뻘 흘리는 어진의 즉석 진행과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채워졌다.
밀양 765v 송전탑 반대 운동은 밀양에 송전탑이 세워지면서 어떤 분기점을 지나게 되었다. 이미 세워진 송전탑을 단기간 안에 뽑아낼 수도, 세워진 송전탑에 대한 문제 제기를 빠르게 밀어붙일 수도 없다. 그럼에도 밀양 주민들은 송전탑 옆에서 삶을 지속해야 하고 우리는 이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 어떤 전환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꽤 긴 기간 해왔던 운동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는 일이 쉬울 리가 없다. 바닥에 둘러앉아 명백한 대상을 향해 구호를 외치는 일을 줌에서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는 일로 전환하기 역시 쉽지 않지만,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며 단순히 추억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운동으로 가져오는 것은 더 쉽지 않다.
개관식에서 내가 울었던 것은 마냥 반갑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 운동을 현재의 삶으로 가져오는 일이 얼마나 쉽지 않은지, 그럼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일을 하고자 마음을 냈는지가 느껴졌다. 문득 밀양에서의 기억이 내 세포 어딘가에 자국을 남겨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간 매년 몇 번씩이나 찾아갔으니, 지속적으로 꾹 눌린 흔적이 내게 없을 리가 없다. 환경과 사람들의 삶이 철저하게 배제될 때 발생하는 아픔과 소외가, 밀양에서 만난 할머니의 얼굴들과 주민분들의 환대가 내게 남아있다. 닥쳐오는 여러 일들 때문에 밀양이 내 삶의 한 중심에 자리하지 않더라도, 나는 내게 생긴 자국 때문에 앞으로도 밀양과 함께 살아가게 될 것이다.
밀양은 많은 자국을 남겼다. 나와 같은 한 개인의 삶에도, 환경 운동의 맥락에서도, 전기와 관련된 문제에서도, 국가 폭력의 층위에서도 그렇다. 밀양이 남겼던 모든 자국을 다 기록할 수는 없지만, 꽤 많은 자국이 <밀양·청도 송전탑 반대 투쟁 온라인 기록관>에 기록되었다. 개관식이 열린 다음에야 나는 이 기록관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밀양의 자국이 이렇게라도 기록으로 남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기록관의 개관을 준비하고 함께 축하했던 모든 사람에게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