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밭을 뛰노는 것처럼

 춘식 (지식순환협동조합 사무국원)




  안녕하세요, 아젠다 구독자 여러분. 저는 지순협과 삼색불광파에서 활동하고 있고 2021 비학술적 학술제 기획팀에 참여했던 춘식이라고 합니다 :) 올여름엔 찬과 함께 삼생불광파를 소개하고 2021 비학술적 학술제의 포부(?)를 밝히는 인터뷰를 갖기도 했었는데요,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 어느새 비학술적 학술제를 마치고 애프터 격의 글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글쓰기에 특별히 재주가 있는 편은 아니어서 큰 웃음과 감동을 드리지는 못하더라도 비학학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찬찬히 풀어보려 합니다. 한 해가 여물어가는 때에 따뜻한 차와 함께 편하게 읽으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활동하고 있는 지순협에 대한 짧은 소개로 다시금 시작해보려 합니다(삼색불광파에 대한 소개는 8월호 인터뷰를 참조해주세요). 풀네임으로 지식순환 사회적협동조합은 대안대학을 비롯해 여러 교육 프로그램과 연구 사업을 운영하는, 올해로 7년 차를 맞이한 협동조합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몇 가지 개념과 키워드로 설명하기도 하는데 오늘의 글에서는 배움의 힘을 믿고 그 과정을 만드는 공간이자 사람들이라고 소개하는 게 적당할 듯하네요. 


▲ 지순협 사무국 멤버들의 캐리커쳐. 왼쪽부터 춘식, 두두, 나미, 하와 

  저는 이런 지순협에서 2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지금은 사무국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우연하게도 2020 비학학이 한창 진행 중이던 작년 말에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으니 이제 만 1년을 채워가고 있네요. 1년 동안 팀원인 두두, 하와, 나미와 함께 넷이서 좌충우돌하며 공부할 때와는 또 다른 배움을 이어가는 중입니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한 해를 돌아보는 감상에 빠지고 싶기도 하지만 허락된 지면이 있기에 이 얘기는 언젠가로 미루고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올 한 해 저의 시간에서 가장 큰 밀도를 차지했던 것을 꼽으라면 비학술적 학술제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시작은 단순한 아이디어와 제안이었습니다. 2년 동안 길드다에서 제안하고 준비해주었던 비학술적 학술제를 올해는 삼불파와 지순협이 먼저 제안하고 좀 더 주도적으로 참여해보면 어떨까 하는. 쓰면서 돌이켜보니 단순한 아이디어였을지는 몰라도 제안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결코 단순하지는 않았었네요. 우리가 먼저 이 얘기를 던지는 것이 괜찮을지, 하게 된다면 누가 역할을 맡을지, 어떤 비학술적 학술제를 만들 것이며 어떤 이들이 참여하기 바라는지를 삼불파와 지순협을 오가며 고민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느꼈던 갈등은 저 역시도 이전 비학학이 즐거웠고 좀 더 깊게 개입해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지만 동시에 ‘내가 잘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과 머뭇거림 앞에서 위축되는 것이었습니다. 긴장하면 허리가 아프곤 하는데 처음 네트워크 회의를 열던 날에도 꽤나 긴장한 나머지 등허리가 굳었던 기억이 납니다. 

  

▲ 지순협 공간에서 작업 중인 춘식


  함께 해준 네트워크 단체들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준 덕에 회의는 유의미한 결론 몇 가지를 낼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구체적인 공부와 토론이 가능하도록 주제를 좁히자는 것, 둘째는 공동의 언어를 형성할 수 있도록 함께 공부하는 시간을 갖자는 것, 셋째는 이러한 과정을 준비하고 진행할 기획팀을 구성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후에는 기획팀을 꾸려 열띤 논의 끝에 ‘공정’이라는 주제와 함께 읽을 텍스트를 정하고, 2021 비학학의 전체 과정1)을 설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물론 서로 다른 방식으로 활동하는 이들이 모여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저마다의 루틴이 있고 각자가 처한 상황이 다르니 어떤 것을 할 수 있고 하고 싶은지, 어떻게 할 것인지를 조율해나가는 과정이 꼭 필요하지만 그만큼 지난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비슷한 결의 고민을 가진 이들이 모였으니 서로의 방식을 존중하면서도 나름의 답을 찾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기하게도 허리 통증이 멎었던 건 본격적으로 비학술적 학술제가 시작되면서 부터였습니다. 참여자를 모집하고 첫 모임을 가질 때까지만 해도 긴장 상태였던 것 같은데, 막상 세미나가 궤도에 오르고 나니 슬슬 재미있다고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적지 않은 분량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세미나와 이후의 워크숍을 동시에 준비하는 게 부담이 될 때도 있었지만 ‘공정’에 대해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비학학의 취지에 마음이 동한 사람이 많다는 것,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과 이렇게 다양한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그 자체로 즐거운 순간이었습니다. 

  

▲ 2021 비학술적 학술제 <파이싸움> 포스터


  최종 행사인 학술제 [파이싸움: 공정-바깥-말하기]에서는 또 다른 종류의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행사를 준비한 기획팀의 입장에서나 한 명의 참여자로서나 아쉬운 점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세미나-워크숍-학술제로 이어지는 장기간의 프로젝트가 나름의 완결성을 가지고 막을 내릴 수 있었다는 것, 각자의 생각을 글, 음악, 영상으로 풀어준 이들과 그 이야기에 관심 가지고 한 마디씩 얹고 싶은 이들이 모였다는 것에서 비학술적 학술제의 의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2021 비학학이 끝난 후에도, 어쩌면 또 한 번의 비학학을 지나왔기 때문에 여러 고민이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본격적으로 대선 시즌이 시작되면서 정치 기사에서 공정이란 단어가 빠지지 않지만, 여전히 무엇을 위한 공정인지 알 수 없고 이대남, 이대녀를 비롯해 청년이라 부르는 목소리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메아리와 같습니다. 그 외에도 제도권과 비제도권은 무엇인지, 앞으로 비학학 네트워크는 어떤 연결이 되어야 하는지와 같은 고민들이 남지만 오늘의 글은 여기서 마치려고 합니다. 지면을 내어주신 길드다 친구들과 긴 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다들 좋은 연말되시길!


  P.S

  눈이 소복이 쌓인 밤입니다. 서울보다도 눈이 많이 오는 곳에서 나고 자라 이맘때를 애틋이 여기는 저로서는 내일이면 거리에 나와 눈을 흩뿌리고 뭉치는 재미에 푹 빠져 손이 빨갛게 익어 가는지도 모를 아이들(그리고 어른들)의 모습이 벌써부터 선합니다. 정신없이 한 해를 보내고 나면 다시 내리고 쌓이는 한겨울의 눈처럼 비학술적 학술제도 어느덧 연례행사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내년에도 오늘 밤과 같은 눈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온다면 사랑하는 이들이 뛰어나와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그런 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1) 2021 비학술적 학술제는 공통 텍스트(아이리스 매리언 영, 『차이의 정치와 정의』, 1990)를 함께 읽고 공부하는 <사전 세미나>, 각자의 질문과 생각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는 <결과물 워크숍>, 그렇게 생산된 결과물을 발표하고 토론하는 <학술제>의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