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리스크’를 넘는 새로운 경로들
지원 (길드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온통 ‘가족 리스크’다. 내가 대통령 후보들에게 궁금했던 것은 젠더 갈등에 대한 생각, 차별 금지법에 대한 의견,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집값 상승에 대한 실질적인 대책과 같은 것들이었다. 물론 거대 양당의 유력 대권 후보들이 그런 이슈에 대해 발언하거나 의견을 낼 거란 큰 기대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이건 좀 심하다. 정책이나 철학에 대한 이야기는 없고, 하루가 멀다 하고 쌓이는 의혹들에 대한 짤막한 해명들과 전략적 사과(혹은 ‘개 사과’)들만 있다. 화면을 채우는 그러한 장면들은 우리로 하여금 분노를 일게 하거나, 실소를 터트리도록 하거나, 엉뚱한 궁금증으로 애초에 내가 가지고 있던 궁금증의 방향을 바꾼다: “근데 그래서 진짜 위조를 했다는 거야?” 나는 어느 순간 매일 아침저녁으로 그것을 확인한다. 그러다 궁금하지도 않았던 예능 프로그램을 검색하거나 들어보지도 못한 인터넷 쇼핑몰을 배회하는 나를 발견한다. 끝내 밝혀지지 않지만 계속해서 업데이트되는 ‘속보’와 ‘단독’들은 매번 나의 클릭을 유도하고, 여기서 생긴 허탈함은 광고 배너나 연관 기사를 따라 뭔가를 구매하게 만든다. 대통령 선거는 거대한 쇼핑 광고판 정도가 된 것 같다.
진지함은 강렬함으로
“진지함을 향한 욕구는 점차적으로 강렬함을 향한 욕구로 대체되었다”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영상 작가인 히토 슈타이얼이 오늘날 다큐멘터리즘에 대해 이야기한 책 『진실의 색』에서 한 말이다. 다큐멘터리는 알다시피 ‘실제로 있었던 어떤 사건을 담은 영상물이나 기록물’을 뜻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다큐멘터리즘은 다큐멘터리라는 영상 장르뿐 아니라 오늘날 진실을 표방한 영상 및 기록 전반, 그러니까 언론 보도나 영상의 기법, SNS 등 미디어 환경 전반에서 사실들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디지털카메라와 인터넷 미디어가 보편화된 세계에서 진실은 어떻게 구성되는가?”와 같은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그는 글에서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생중계하는 CNN의 영상을 인용하며 영상의 ‘흐릿함’에 주목한다. 흐릿한 영상 속에서 특파원은 이렇게 외친다. “이런 영상을 여러분은 이제까지 보신 적이 없습니다!” 히토 슈타이얼은 실제로는 그 해상도로 인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음에도 화면이 담보한다고 우리가 믿는 진실에 주목한다. “사건에 더 가까이 다가가 있는 것처럼 보일수록, 그것은 그만큼 더 불확실하고 흐릿해지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때 낮은 해상도는 오히려 그 신뢰도를 높여주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요즘 삼성 스마트폰에서 사용할 수 있는 100배 줌 기능을 생각해 보자!). 그는 이를 통해 한 발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실재와 일치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지속적인 회의는 다큐멘터리 형식의 인정해서는 안 될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결정적 특성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보고 있는 “이것이 정말 진실인가?”와 같은 질문은 오늘날 더 이상 핵심이 아니다. 미디어는 우리의 진지한 궁금증을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질문의 방향을 바꾸고, 강렬함을 생산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렇게 이해하면, 나의 애초의 궁금증과 언론이 제공하는 정보 사이의 간극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미디어는 ‘접속’을 요구한다. 이 접속은 강렬한 이미지를 반복함으로써 그 기회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식당에 소리도 없이 무심히 켜진 TV 화면에 집중하게 되는 순간은 지루한 1시간 반의 축구 경기에서 크롭crop 되었을 경이로운 하이라이트의 반복이 눈에 들어올 때다. 모두가 주목할 만한 정치인의 실언 장면의 반복과 자극적인 자막, 그에 대한 전문가라 불리는 권위자들의 논평과 해설 장면에 눈이 멈출 때다. 즉 언제나와 같이 이어지는 우리 일상의 평이함을 ‘절단’하고 완전히 다른 흐름으로 촉발할 수 있는 강렬한 이미지의 반복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미디어 환경은 히토 슈타이얼이 지적하듯 그 진실 여하와 상관없이, “진지함이 강렬함으로 대체”되는 경향을 보인다. 후보의 진지한 정책과 철학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며, 즉각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종류의 강렬한 이슈들이 논의를 선점한다.
기획되는 이미지
물론 그러한 경향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정동과 미디어의 관계를 연구하는 일본의 미디어 학자 이토 마모루는 『정동의 힘』에서 이러한 현상을 텔레비전이라는 시청각 미디어의 등장이 전통적인 정치의 ‘위장僞裝’적인 특성과 대비되며 정동을 촉발하는 것이라 분석했다. 이때 전통적인 정치란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라면 스스로의 의도를 숨길 수 있는 수사적 정치이고, 공과 사의 구분을 기본으로 하던 근대적 주체성의 공적 정치이다. 그가 주목한 것은 과거와 달리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스스로를 그대로 드러내는” 정치인의 등장이다. “스스로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행위는, 강렬한 정동을 환기시키고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한다. 그는 1980년대 로널드 레이건의 당선을 이미 그것의 결과로 보았다. 레이건의 당선은 그의 정책이나 철학, 논리적 일관성이 아니라, 미디어를 통해 노출된 어떤 이미지, 그리고 그것에 공명한 유권자들에 의한 것이다. “레이건의 논리적 일관성 없는 연설이, 잘게 절단된 영상을 연결한 텔레비전 영상을 통해서 전국적으로 전해질 때, 그것은 가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촉발=변용의 강도를 높인다. ‘강한 미국’을 체현하는 레이건의 서툰 몸짓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스쳐 지나갈 뿐, 텔레비전의 단편화된 영상 속에서는 감춰지고, 자신감으로 흘러넘친 순간의 표정만이 비춰지면서 그것을 보는 사람에게 강한 정동을 환기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텔레비전과 시청자가 만나는 장에서 현실화되는 ‘왠지 저 사람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정서나 감정이라는 것이다.
정동 이론을 연구하며 미디어의 중요성을 지적한 철학자 브라이언 마수미 역시 『정동 정치』에서 레이건의 예시를 중요하게 다루는데, 혹자가 레이건이 텔레비전을 통해 이미지를 ‘조작’했다고 하는 것을 두고 마수미는 그가 “신뢰라는 공기나 분위기를 기획”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텔레비전을 통해 만들어지는 정서에선 의미, 언어, 논리보다 그 이미지가 더 중요하고, 그것은 일부의 진실로써 ‘조작이 아닌 기획’인 것이다. 여기서 역설이 발생하는데, 이토 마모루는 모든 것이 보여지는(것처럼 보이는) 미디어 환경에서 이렇게 기획된 일부의 진실을 ‘새로운 위장의 기술’이라고 말한다.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미디어 학자들에게 이것이 조작이 아닌 기획이자 기술인 중요한 이유는 텔레비전, 시청자, 정치인이라는 각각의 항들이 특정 주체가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종류의 관계가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텔레비전까지 포함하여 이들은 사건을 구성하는 부분-주체들로 참여한다. 이는 그전에는 우리의 의지라고 생각되었던 것들이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히려 미디어로부터 촉발된 어떤 감정들에 의해 판단이 이루어지고, 그러한 판단들이 다시 미디어를 촉발하며 어떤 순환, 피드백을 만들어낸다. 이때부터 욕망은 이 피드백을 중심으로 생산된다. 발신하는 이미지와 달성해야 할 목표 혹은 목적의 성취 여부가 의지와 분리된다.
그런데 두 미디어 이론가들이 분석한 2000년대 당시와 달리, 오늘날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들은 매우 줄어들었다. 더 가까운 현재의 상황에서 나는 마수미가 ‘공기나 분위기의 기획’이라고 표현한 것의 실패를 본다. 그것은 텔레비전을 기준으로 기획된 발신자-발신기-수신자의 공진共振관계를 작동시키는 기술이 스마트폰의 등장과 함께 다른 문법으로 이행했기 때문이다. 2010년대부터 삽시간에 보급된 스마트폰과 이에 기반 한 다양한 소셜 네트워크 및 플랫폼 서비스는 텔레비전, 혹은 제한된 시공간에서만 사용될 수 있었던 컴퓨터를 훨씬 상회하는 이동성과 즉시성을 확보한다. SNS, 인터넷 커뮤니티의 피드백은 이제 분초 단위로 이루어진다. 사건을 구성하는 부분-주체 또한 훨씬 다변화되었다. 텔레비전의 시청자와 정보를 다양한 경로로 수집 및 전파(생산 및 재생산을 겸하는) 하는 오늘날의 정보 이용자는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그 역할을 달리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러한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기획은 존재한다.
새로운 경로들 회로들
앞서 텔레비전과 관련한 정동과 미디어의 초기 논의에서 살펴보았듯, 미디어는 정동과 결합하며 강렬한 힘을 만들어내고, 이 힘은 적절한 피드백과 결합해 재생산되어 특정한 의도나 의지와 상관없이 작용한다. 이토 마모루에 따르면 그것은 우리의 신체에 무언가를 유발한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그게 무엇을 유발하는지는 불확실하다. 오늘날 사람들은 어떤 하나의 목표를 향한 언어, 이데올로기, 설득에 의해 집합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혹은 그것에 대항하는 집합적 행동을 하지도 않는다.”라고 그는 말한다. 마수미 역시 이런 유발이 같은 행동으로 이어지기보다 “같은 정동으로 조율되고 접속되면서 일치하여 반응하게 된다.”고 말한다. 오늘날의 기획은 그런 점에서 아마도 미디어 기업 혹은 거대 네트워크 서비스 제공자나 플랫폼 기업들의 그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레이건 시절의 ‘공기나 분위기의 기획’과는 다르다. 그런 시도 역시 없는 것은 아니나, 대선이 만들어내는 최근의 뉴스들을 봤을 때 그 예측도 실천도 모두 예상을 빗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정동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기획은 오직 욕망과 정동의 흐름들을 절단, 채취해 잠깐의 주목을 끌고, 흐름을 우회하는 기획이다. 이들은 마치 원자핵을 이용해 전기를 만드는 발전소처럼 이 정동의 불안정하고 일치되지 않은 강렬한 힘에서 이윤을 뽑아낸다. ‘가족 리스크’와 ‘개 사과’를 우회해 우리를 쇼핑몰로, 유튜브 조회 수로 이끄는 이 발전소적 기획만이 유효해 보인다. 대통령 선거는 그러한 의미에서 광고판이 된다. 그런데 우리, 사건의 부분-주체들은 수많은 소셜 네트워크와 커뮤니티, 플랫폼에도 불구하고 무력한 수신자로 머물 수밖에 없는가?
마수미는 미디어와의 관계에서 수용할 뿐 아니라 행위 하는 부분-주체들의 반응은 “많은 형식을 가졌고, 실제로 많은 형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상황이 분명 자본 혹은 권력의 영향을 받지만, 그것의 일방적인 조정으로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것은 언제나 상호작용 속에서 벌어지는 효과다. 달리 말해 상황의 지속이 만들어낼 어떤 결과에 대해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며, 이런 종류의 분노와 실소는 분명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현행적인 변화들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마수미의 말대로 만약 그것이 이미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지형의 변화들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그다지 낙관적으로 읽히지 않는 현재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음과 같은 변화들을 그 효과로 읽고 싶다. 2022년 대통령 선거를 여성 혐오 대선으로 규정하고 이를 규탄하는 목소리들(‘샤우트 아웃’, 12.12), 20대 여성 유권자들이 가장 높은 비율로 거대 양당을 지지하지 않고 있다는 여론조사(KBS 의뢰 한국리서치, 11월 2주 차), 또 이들 중 60% 이상이 ‘지지 후보를 바꿀 수 있다’는 응답을 하고 있다는 점 등이다. 이는 내가 앞서 언급한 이른바 ‘발전소적 기획’이 현재 ‘이대남’ 등을 중심으로 젠더 차별의 양상을 등에 업고 진행된다는 점에서 정치적 지형에 유의미한 변화라고 느껴진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정의당의 류호정, 장혜영 의원과 같은 여성 청년 의원들의 당선 또한 같은 맥락에서 분석될 수 있지 않을까.
거대한 쇼핑 광고판이라는 흐름, 그러한 기획으로부터 벗어날 방법은 새로운 경로들과 회로들에 접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더 다양한 통로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적 언론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뉴스 포털에 대해 진행되고 있는 언론미디어 제도 개선특별위원회의 문제제기와 개혁 입법은 아주 기본적인 하나의 방안으로 충실히 진행되어야 한다. 포털이 기사의 배치와 광고 및 연관 기사라는 정동의 통로를 쥐고 있는 상황에서 이 상황은 나아지기 어렵다. 각종 유튜브, 1인 미디어 혹은 독립 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정의당 의원들의 선거 캠페인은 메인화면에 걸리지 못하지만 기존 언론이 담지 못하는 메시지를 내는 중요한 경로가 된다. 나는 허탈함에 의해 쇼핑몰로 가는 대신 환경정책, 여성정책, 여타 부동산 정책에 대한 고민들을 진전시키는 정의당의 플랫폼으로 간다. 그 외에도 내가 궁금해하지만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젠더 이슈나 차별 금지법과 관련한 진행 상황을 늘 팔로우 업 하는 <NEWNEEK>과 같은 소규모, 1인 미디어들의 꾸준한 시도도 그 회로들 중 하나다. 어쩌면 우리 길드다가 발행하는 <아젠다> 역시 그 일환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새로운 경로들, 회로들과 관련해, 마지막으로 앞서 인용한 히토 슈타이얼의 글 일부를 인용하며 마칠까 한다. 그는 미디어와 관련한 정동의 움직임이 상호적이라는 점에서, 우리 자신들의 판단, 행위들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처럼 가속화된 정동의 세계에서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수신자인 동시에 발신자이다.
“만약 우리 모두가 이미 이미지의 권력에 편입되었다면 이러한 촬영의 위치는 어디여야 하는가? …그것은 윤리적이고 정치적으로, 시간의 관점에서 사유되어야 한다. 오로지 미래의 관점에서만, 이미지를 지배 권력에의 연루로부터 풀어내는 미래의 관점에서만 우리는 비판적 간격을 재획득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비판적 다큐멘터리즘은, 지금 수중에 있는 것―우리가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관계들 속으로의 편입―을 보여주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관점에서 보면, 아직 전혀 존재하지 않는, 아마 언젠가는 도래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이미지만이 진실로 다큐멘터리적이기 때문이다.”
곱씹어 보자. 새로운 경로들, 회로들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길드다의 대선 이야기는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 글쓴이 김지원은 프리랜서로 가구를 만들고 공간 디자인을 하며 청년 인문스타트업 길드다에서 활동 중이다. 길드다에서 청년과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인문 교육 프로그램들을 기획/운영하였으며 길드다 멤버들과 함께 펴낸 책『다른 이십대의 탄생』의 공저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