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겜알못’들을 위한 안내서 : 당신이 모르는 게임에 대한 이야기들
차명식 (길드다)
혹시 ‘게임 셧다운제’와 <마인크래프트>(이하 마크)에 대해 알고 계시는지? ‘게임 셧다운제’는 16세 미만의 청소년들이 오전 0시부터 오전 6시까지 인터넷 게임에 접속할 수 없도록 강제하는 제도이며 <마크>는 일종의 블록 쌓기 게임으로 한국에서는 특히 초등학생들이 즐겨하는 ‘초통령’ 게임으로 통한다. 헌데 작금 이 두 가지가 한데 엮이면서 한국의 게임 인식에 대한 논란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문제는 최근 <마크>를 서비스하는 회사가 바뀌면서 발생했다.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일찍이 한국의 게임 셧다운제를 자사 서비스에 적용하는데 난색을 표하며 아예 한국에서는 자사의 게임 서비스를 성인들만 접속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는데, 이제 <마크>가 마이크로소프트사 관할로 넘어가면서 초통령 게임이 졸지에 성인용 게임으로 뒤바뀐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마크>가 현재 한국을 포함한 세계 곳곳의 교육 현장에서 교육용 프로그램으로도 활용되는 게임이며 당장 작년 어린이날만 해도 정부가 <마크>의 세계에 가상의 청와대를 만들어놓고 어린이들을 초대하는 행사를 벌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게임’(이 글에서 ‘게임’은 컴퓨터와 휴대폰, 게임기 등을 사용하는 ‘비디오 게임’을 일컫는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양가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우리 사회에서 게임은 청소년과 젊은 층에게 높은 접근성을 가진 유가치한 콘텐츠인 동시에 그들에게 해악을 끼칠 수 있기에 엄밀히 규제되어야 하는 대상이기도 하다. 이처럼 상반된 인식의 충돌 속에서 게임에 대한 찬반양론은 날이 갈수록 격해지고 있으며 다양한 규제와 저항들이 그 위를 표류하는 중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 게임의 규제를 두고 벌어지는 이러한 논쟁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논쟁의 대상인 게임 그 자체에 대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 게임이 무엇인지, 실제 게이머들 - 아이들을 포함한 - 이 게임에 접속해 무엇을 하는지, 그것이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키며 어떤 효과를 갖는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게임을 직접 플레이 해본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그러한 앎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게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선 전혀 얼토당토않은 것이 아닐까?
물론 게임의 세계는 방대하며 수많은 장르와 수많은 게임들이 제각기 다른 맥락을 가지고 존재하기에 그것들 모두를 분석하고 통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적어도 그 중 일부에 대해 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게임을 둘러싼 여러 논쟁에 있어 보다 넓고 다양한 시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이 글에서는 몇 가지 게임들을 살펴봄으로써 우리에게 게임이 갖는 의미와 효과, 가능성에 대하여 간략하게나마 알아보려 한다. 자, 그럼 지금부터 게임을 시작하자.
첫 번째, ‘놀이’로서의 게임 : 여전히 놀이인 것.
모두가 알고 있을 법한 게임으로부터 시작하자. 닌텐도사의 <포켓몬스터> 시리즈이다.
<포켓몬스터> 시리즈는 1996년 첫 작품이 발매된 이래 지금까지 약 25년에 걸쳐 활발히 신작을 내며 유지되고 있는 전설적인 게임 프랜차이즈다. 모든 시리즈를 통틀어 약 3억 6,800만 장이 팔린 이 게임은 그 긴 역사에 걸맞게 세대를 초월한 팬 층을 확보하고 있어 어릴 적에 게임을 플레이하던 이들이 부모가 되어 다시 자기 자식들에게 게임을 사주는 일이 그리 드물지 않을 정도다. 10년이면 강산이 바뀌고 시간이 지나면 유행도 변하기 마련일진데, 포켓몬스터 시리즈는 어떻게 그토록 오랜 시간 동안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포켓몬스터 시리즈를 최초로 디자인한 타지리 사토시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어린 시절 취미는 동네의 산, 들판, 호수, 숲을 탐험하며 다양한 곤충을 채집하는 것이었다. 훗날 어른이 된 그는 비디오 게임에서 어린 시절 자신이 느꼈던 즐거움을 재현하고자 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포켓몬스터였다.
포켓몬스터는 가상 세계를 여행하며 ‘포켓몬’이라 불리는 다양한 생물을 채집하고, 그 생물들과 어울리며 유대를 쌓고, 자신의 포켓몬과 다른 포켓몬을 대결시키는 게임이다. 즉 포켓몬스터라는 비디오 게임이라는 형식 안에는 탐험과 채집, 동물을 기르는 즐거움이라는 ‘원초적인 놀이의 기쁨’ - 언제나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존재할 아이들의 놀이가 들어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타지리 사토시는 ‘우리 유년기에는 들로 산으로 나가 뛰놀았는데 요즘 아이들은 게임만 한다’는 기성세대의 한탄을 비판하며 오히려 자신은 도시화로 인해 아이들이 접할 수 있는 생물들이 사라져가는 이 시대에 자신이 어린 시절 느꼈던 즐거움을 이 게임에 담아내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이는 앞서 다루었던 <마크>도 마찬가지다. <마크>는 정육면체 모양의 블록들로 이루어진 가상 세계를 탐험하며 다양한 자원들을 캐내는 게임이다. 플레이어는 해당 자원들로 건물을 지을 수도 있고 농사나 목축을 할 수도 있으며 무기를 제련할 수도, 마을이나 나라를 만들 수도 있다. 또한 이 게임은 여러 플레이어들이 함께 접속하여 즐길 수 있으며, 게임 내에서 어떠한 역할을 맡아 연기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마크>는 비디오 게임이라는 형식을 통해 탐험, 채집, 블록 쌓기, 인형놀이, 소꿉놀이와 같은 놀이들을 아우른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아이들이 게임을 통해 얻는 즐거움은 현대 사회에 느닷없이 나타난 새로운 형태의 즐거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기성세대들이 어린 시절 즐겼던 놀이, 아니 그보다 이전 인류사 전체를 통틀어 아이들이 항상 즐겨왔던 여러 놀이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새로운 세상을 접하고, 처음 보는 것들을 모으고, 상상하는 것을 만들고, 어른들의 사회를 흉내 내는 그러한 원초적인 놀이들에서 오는 즐거움. 그것이 놀이로서의 게임이다. 어쩌면 우리는 게임을 지나치게 낯설게 여기는 데서 오는 경계심을 조금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두 번째, ‘배움’로서의 게임 : 숙련되어야 하는 것.
<리그 오브 레전드>, 통칭 ‘롤(LOL)’은 아마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가장 대중적인 게임일 것이다. 이 게임은 열 명의 플레이어가 저마다의 캐릭터를 골라 다섯 명씩 두 편으로 나뉘어 대결하여 상대의 기지를 먼저 파괴하면 승리하는 게임이다. 그러나 이토록 간단한 게임의 목표와는 달리 그 세부요소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복잡하고 정교하다.
롤에서 플레이어들이 고를 수 있는 캐릭터는 총 155개이고 이 캐릭터들 하나하나가 각각 다섯 개에서 여섯 개 정도의 고유한 특수 능력을 갖기에 약 600여 개에 달하는 특수능력이 존재한다. 또 각 캐릭터는 최대 여섯 개의 장비를 들 수 있는데 그 장비의 종류만 다시 수백 개이며 장비 조합의 경우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다. 더 큰 어려움은 이러한 정보들을 단지 지식으로서 암기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플레이어는 이 각각의 정보들이 어느 순간 가장 유용할지 판단하여 적재적소에서 사용해하면서 그것을 결정하여 실행하는 과정에서도 최대한 빠르고 정교하게 손을 움직일 필요가 있다. 심지어 롤은 팀 게임이기 때문에 위의 과정 전반을 팀원이라는 타인들과 호흡을 맞춰가며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때문에 롤과 같은 게임은 풍부한 사전 지식, 적절한 정보의 활용과 신속한 판단, 그것들이 구축하는 패러다임에의 숙달, 그것들을 실제로 구현해낼 수 있는 뛰어난 신체 능력, 그 모든 것을 팀원들과 발맞춰 행할 수 있는 팀워크를 - 한 마디로 게임에 대한 고도의 숙련을 요구한다.
이러한 복잡성은 롤 이전의 또 다른 ‘국민 게임’이었던 <스타크래프트>도 마찬가지이며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와 같은 대규모의 인원이 참여하는 온라인 게임도 마찬가지이고, 그 외 정교하게 현실을 재현하는 다양한 ‘시뮬레이션’ 장르 게임들도 공유하는 특성이다. 비행기 조종을 거의 그대로 구현한 <플라이트 시뮬레이터> 시리즈, 현실에서 축구 감독의 역할을 구현한 <풋볼 매니저> 시리즈, 가장 세세한 부분까지의 도시 건설을 구현한 <시티즈 스카이라인>과 같은 게임들은 모두 고도의 복잡성을 갖는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러한 게임을 즐기는 과정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들도 놀랄 정도로 빠르게 그 복잡성에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비록 그 익숙해짐의 결과로 닿을 수 있는 ‘경지’에는 사람마다 큰 편차가 존재하지만 말이다.
이 숙련의 과정은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일을 배워나가는 요령과 비슷하다. 여러 현실적 조건들로 인해 우리가 일상 속에서 조우할 수 있는 배움의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공부’든 ‘일’이든 대단히 한정되어 있기 마련인데, 이런 종류의 게임들은 그런 장벽들을 넘어서는 경험들을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다. 우리가 피상적으로밖에 알 수 없는 파일럿, 축구감독, 도시계획자의 역할을, 혹은 완전한 가상세계의 역할을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도록 하여 우리의 지평을 넓혀주는 이러한 경험들. 밖에서 보았을 때에는 대체 무엇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규칙들과 도구의 용법들을 시행착오 속에서 자연스레 익혀가는 과정들. 이와 같은 창조적 배움의 과정은 오늘날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경험의 종류이면서 게임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경험들 중 하나이다.
세 번째, 예술로서의 게임 : ‘해보는’ 것.
게임은 예술이 될 수 있을까? 이는 게임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물론 게임 팬들 사이에서도 크게 의견이 갈리는 화제다. 누군가는 게임이 이미 영화와 같이 충분히 상업예술의 영역에 들어섰다고 주장하고, 또 누군가는 어설프게 예술 흉내를 내기보다 직관적인 재미에 충실하는 것이 게임이 할 일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는 예술을 정확히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서도 갈리는 이야기인데, 만일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세계를 낯설게 경험하는 것’을 예술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몇몇 게임은 한참 전에 예술의 영역에 진입했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페이퍼 플리즈>는 몇 년 전 큰 반향을 일으켰던 인디 게임으로, 공항 통관의 직원이 되어 여권을 검사하는 게임으로 여권의 내용을 잘 살펴보고 이상한 점이 없는지 확인해 승객을 걸러 내거나 통과시키는 일종의 퍼즐 게임이다. 하지만 이 게임의 세부적인 요소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이것이 단순한 퍼즐 게임 그 이상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먼저 플레이어는 설정 상 북한이나 과거 소련과 같은 독재국가의 국민이며 한 가정의 가장이기도 하다. 플레이어가 매번 여권 검사를 마칠 때마다 검사한 여권의 수만큼 수당이 주어지는데 그 수당에서 다시 집세, 가족의 생활비, 친척의 병원비 등이 빠져나간다. 또 때때로 승객들은 플레이어에게 뇌물을 주면서 부실여권을 통과시켜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개인 사정을 털어놓으며 플레이어에게 자비를 간청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비밀 혁명 결사가 플레이어에게 가담을 요구하기도 하고 독재정권의 비밀경찰이 플레이어에게 협력을 요청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플레이어는 자신의 양심과 부양해야 할 가족들의 상황 등 다양한 조건 속에서 어떠한 결정을 내릴 것을 요구받는다. 또한 플레이어는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여권 검사 속에서 처음에는 신선했던 퍼즐이 의무적인 노동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몸으로 느끼며 독재국가에서 소모품으로서의 인간이 겪는 소외 역시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페이퍼 플리즈>는 대단히 신선한 아이디어를 통해 플레이어에게 독재국가의 국민으로서의 삶이 무엇인가를 체험시키는 동시에 플레이어가 자신의 선택을 통해 그 체험을 능동적으로 주도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회화가 고정된 한 장의 이미지로서, 소설이 활자를 전달수단으로 하는 하나의 흘러가는 이야기로서, 영화가 시각과 청각적 요소를 포함하는 이야기를 제시함으로써 관객에게 낯선 경험을 선사한다면 게임은 그에 더하여 플레이어가 그 안에서 실제 선택하고 행동하게 만듦으로써 새로운 차원에서 이야기에 몰입하고 경험하게 만든다. 이 외에도 발칸반도 전쟁 난민들의 생존기를 다룬 <디스 워 오브 마인>, 빙하기의 재래로 멸망 직전에 몰린 인류의 지도자가 되어보는 <프로스트 펑크> 등 이와 같은 형태의 게임들은 다수 존재하며, 이런 점들을 볼 때 게임은 완전히 새로운 형식의 예술이 될 잠재력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게임은 이미 시작되었다
자, 이로써 우리는 오늘날 게임이 갖는 세 가지 측면들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이상에 따르면 게임은 원초적인 ‘놀이’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는 것이며, 새롭고 창조적인 ‘배움’의 경험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자,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경험하는 ‘예술’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물론 오랫동안 문제가 되어 온 몇몇 온라인 게임들처럼 명백히 ‘도박’의 속성을 갖는 게임들, 과금을 유도하고 과시를 위한 사치재로서만 활용되는 게임들, 혹은 그 외의 방식으로 오직 사용자에게 단편적이고 말초적인 자극과 쾌락을 주기 위한 게임들 역시 존재함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같이 익히 알고 있는 게임의 부정적 측면들과는 별개로 오늘 이 글에서 살펴본 게임의 ‘낯선’ 측면들을 똑바로 마주할 필요가 있다. 게임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는 상관없이 그것이 이미 우리 일상 가장 밀접한 곳까지 침투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건국대학교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거리두기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온라인 속 가상의 세계에 건국대 캠퍼스를 그대로 구현하여 가상의 축제를 개최하였다. 이른바 메타버스Metaverse라 불리는 이러한 기술은 코로나로 인한 언택트 시대에 니즈에 부합하여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으며 건국대의 케이스 이외에도 유력 정치인들의 대중을 상대로 한 커뮤니케이션, 기업체의 비대면 회의, 미술관 등 각종 문화시설 체험 등에 활용되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메타버스 기술은 실제로 게임과 대단히 유사한 형태이며 <마크>를 비롯한 몇몇 게임들은 이미 몇 년 전부터 메타버스의 선도자적 포지션으로 여겨져 왔다. 젊은 세대가 갖는 게임에 대한 익숙함은 앞으로도 메타버스 기술을 비롯한 다양한 게임적 요소를 일상으로 가져오게 할 확률이 높으며 이는 설령 게임을 즐기지 않는 이들이더라도 더 이상 그것을 외면할 수 없도록 만들 것이다.
그리고 사실, 당장 게임에만 몰두하는 누군가를 말리려 할 때 조차도 무턱대고 ‘너 게임 그만해!’라고 윽박지르는 것보다는 그 게임에 대한 지식들을 조목조목 들이대면서 상대를 당황하게 하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실력도 안 되면서 프로게이머가 되겠다며 반항하는 학생을 게임으로 눌러버려 설득시켰다는 선생의 이야기나, 게임 삼매경에 빠진 아들을 게임으로 혼쭐을 내주고 하나하나 패배한 이유를 설명해줘서 방으로 도망가게 만들었다는 부모 이야기처럼 말이다. 그러니 ‘겜알못’으로서(게임 알지도 못하는 사람) 게임을 말하기 전에 우선 한 번이라도 게임을 해보고 동등한 ‘게이머’로서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 어쩌면 당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당신의 게임도 이미 시작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