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페미니즘 코미디 극장

 김지원 (길드다)



“지성은 공감sympathy이다.

 사람은 자신이 공모하면서 연루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결코 비판할 수 없다. 

그래야 비판이 반동적이지 않은 양식, 

창조적 제스처로 될 수 있다.” 

―로지 브라이도티, 『유목적 주체』






 ‘암스트롱맨’과 ‘소추’


  얼마 전 개그우먼 박나래가 연일 SNS와 각종 뉴스를 통해 화제가 되었다. 어린이용 장난감을 리뷰 하는 성인 대상 유튜브 방송 <헤이나래>에서 팔다리가 쭉쭉 늘어나는 장난감 ‘암스트롱맨’을 리뷰 한 영상에서다. 그는 암스트롱맨의 말 그대로 스트롱strong한 암arm을 장난감의 다리 사이로 집어넣어, 남성의 성기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 뒤, 흔들었다. 영상이 업로드된 바로 그날부터 비난 여론이 크게 일었다. 다수의 남성이 “모욕감과 수치심을 느꼈다”, “성희롱이다”며 박나래를 고소했다. <헤이나래>는 폐지되었고, 박나래의 공중파 방송 등 하차 요구가 빗발쳤고, 박나래는 인스타그램에 자필 사과문을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GS25 이벤트 홍보 포스터로부터 ‘남성혐오’ 논란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사라진, 극단적인 페미니즘 커뮤니티로 알려진 ‘메갈리아’를 상징하는 집게 모양 손가락 이미지가 포스터에 들어갔다는 이유에서였다. 여기서 시작된 논란은 BBQ, 교촌치킨, 오비맥주 등 각종 기업의 홍보물 뿐 아니라 SNS 상의 연예인, 정치인들의 과거 사진 속 손 모양 등을 찾아내 조리돌림 하는 활동으로 번지고 있다. 자칫 불매로 이어질 여론이 두려웠던 것인지, BBQ 역시 “논란의 여지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했다”라며 공식적으로 사과문을 올렸고, 정치인들은 해명에 나섰다. 집게모양 손가락 이미지는 한국 남성의 성기가 작다(일명 ‘6.9cm’, 혹은 ‘소추’)는 것을 표현하는 상징이다. 









쓴웃음을 자아내는 코미디


  난 <헤이나래>에서 박나래가 보여준 19금 개그에는 별 감응이 없었다. 그러나 박나래를 고소하고, 박나래에게 “모욕감과 수치심을 느꼈다”는 반응들에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GS25 외 여타 홍보 포스터들이 문제 되기 시작하고, 이에 대기업이 공개적인 사과문을 올렸다는 사실 역시 놀라웠다. 내가 보기에는 이 상황 자체가 훨씬 더 코미디처럼 느껴졌다. 박나래의 그저 그런 개그를 완성한 것은 오히려 GS25 포스터에 ‘열폭’(열등감 폭발)한 ‘한남’(한국남자)들인 것처럼 보였다. 안티-페미니즘 코미디 극장!

  물론 이 모든 코미디는 좀 씁쓸하다. 이것이 연출된 코미디가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들은 우리 사회의 성별 갈등이 얼마나 높은 수준―혹은 읽기에 따라서 낮은 수준―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련의 사건들은 서울시장 보궐선거 전후로 봇물처럼 터진 ‘이대남’ 혹은 ‘이남자’(양쪽 모두 ‘이십 대 남자’를 일컫는다)라 불리는 젊은 남성들에 대한 뉴스와 이들에 대한 허술한 분석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 같다. 그게 아니고서 여성 연예인의 그저 그런 ‘섹드립’과 몇몇 포스터의 손가락 모양에 이렇게까지 반응할 이유가 있을까.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난 이 ‘웃픈’ 사건에서 우리가 진지하게 짚어야 할 지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성별 갈등이 얼마나 많은 오해들로 점철되어 있는지, 그리고 왜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반反페미니즘 정서


  우선 화제가 된 두 사건의 공통점을 볼 필요가 있다. 두 사건은 직간접적으로 남성의 성기를 폄하 혹은 대상화하는 ‘남성혐오’ 사건으로 명명된다. 그리고 비난의 대상은 페미니스트, 혹은 페미니즘이다. 이런 명명과 비난이 주장하는 바는 이미 성별 격차가 많이 사라진 한국 사회에서 박나래의 농담과 GS25 등의 포스터는 남성을 폄하하고 희화화함으로써 여성우월주의적인 페미니즘이 생산하는 이른바 ‘역차별’에 가담한다는 것이다. 





  남성혐오와 역차별. 이러한 논리는 여성에 대한 차별, 여성혐오라는 개념에 대응해 등장한 반反페미니즘의 익숙한 구호다. 5년 전 이맘때 벌어진 강남역 살인사건을 페미니스트들이 ‘여성혐오 범죄’로 규정한 즈음부터 반페미니즘은 남성혐오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 구호가 얼마나 편협한 논리인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여성혐오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개념이다. 오래된 가부장제 사회인 한국에서 여성을 낮추는 언어나, 여성에 불리한 사회·경제적 구조, 여성에게 특히 고통스러운 다양한 문화적 경험들을 우리는 여전히 일상적으로 목격한다. 이러한 차별적 관습들을 특정함으로써 고쳐나가기 위해 고안된 언어가 여성혐오다. 반면 남성혐오는 이 비대칭적인 구조를 무화 시키고 마치 성별 갈등이 일대일의 대칭적인 구조로 보이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얼토당토않은 대칭적 남성혐오를 주장했을까? 이들의 논리를 살펴보면 개인적 경험, 특히 자본주의적인 경쟁 구조에서의 개인적 경험에 우선적으로 초점을 맞춘다. 예컨대 “적어도 나는 여성이 차별받는 역사에 살지 않았다”거나, “오히려 페미니즘 실천들, 여성 정책들에 의해 내가 차별받았다”는 것이다. 추측건대 한 축에는 남녀불문 젊은 세대의 삶의 불안정성의 증대와 경쟁의 심화에 의한 낙오의 경험 일반이 자리한다. 별개의 축으로 지난 6~7년간 페미니즘운동의 약진과 이로 인한 가시화가 존재한다. 이것들이 요상한 이분법적 인과로 한데 뒤섞이며 ‘메갈리아’ 등 다소 급진적인 페미니즘 진영의 목소리가 남성 개인의 낙오를 설명하고 합리화할―혹은 적어도 스트레스를 풀―유용한 핑계가 된 것이다. 





‘메갈’-‘랟펨’-페미니즘?


  이런 배경에서 오늘날 한국 사람들이 ‘페미니즘’하면 떠올리는 것은 십중팔구 ‘메갈리아’로 상징되는 래디컬 페미니즘이다. 집게 모양 손가락을 포함하여 ‘한남충’, ‘6.9cm’, ‘소추’ 등 과격한 단어들과 ‘미러링’이 이들의 유산이다. 그리하여 ‘페미’는 남녀 대결 구도를 부추기는 집단으로,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메갈리아’의 과격한 표현과 전략, 혹은 생물학적 성차를 강조하는 이들의 근본주의적 측면이 남성혐오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핑계거리로 작용할 단서를 제공한 측면을 전혀 없는 셈 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남성혐오와 페미니즘을 동일시하는 반역사적이고 반동적인 논리를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페미니즘이 비판하는 남성성은 특정 사안에서 남성 개인일 수 있지만, 언제나 ‘보편으로서의 남성’이다. ‘보편’이라 함은 정상적인 남성성이라는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상정하고 모두가 그곳을 향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차이들―여성, 노인, 아이, 장애인, 동물…은 여기서 평가 절하된 타자, 부차적 입장이 된다. 이것이 모든 페미니즘이 비판하는 남성중심주의의 본질이다. 래디컬 페미니즘은 이 피라미드를 거꾸로 세움으로써 다른 역사를 쓰고자 하는 페미니즘의 다양한 움직임, 혹은 방법론 중 하나다. 그리고 이러한 움직임은 페미니즘 내부에서도 언제나 논쟁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들이 가시화한 페미니즘, 그리고 이들이 아니었다면 문제화되지 못했을 우리 사회의 수많은 여성혐오적인 측면들까지 한데 묶어 이루어지는 비난이야말로 보편적 남성성으로의 회귀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를 포함하여, 우리가 그간 이런 사정으로 잘 알지 못했던, 오해되어온 페미니즘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는 내 생각에 ‘차이의 정치’다. 이는 동시대 페미니스트이자 포스트휴먼 이론가인 로지 브라이도티의 표현인데, 그에 따르면 페미니즘은 보편으로서의 남성, 가부장 문화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성차화하는 페미니즘은 필연적으로 여성 내부의 차이들과 갈등하기 때문이다. 백인 여성의 페미니즘은 유색인 여성의 페미니즘과 갈등할 것이고, 장애 여성은 즉각 비장애 여성과의 차이를, 이성애 여성은 트랜스젠더 여성과의 차이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가까운 예로 한국인 여성 페미니스트인 내 친구는 아빠 편을 드는 엄마와 갈등한다. 이때 “누가 보편적인 여성의 범주에 포함되는가?”라는 질문이 생겨난다. 여기엔 남성 대 여성으로 축소될 수 없는 고유한 위치들이 있고, 보편적 여성으로 통합될 수 없는 복잡성이 있다. 이러한 복잡성, 차이들을 소거하지 않고 횡단하면서 공존할 수 있는 윤리를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페미니즘의 진정한 과제다. 





무해한 코미디


  다시 박나래와 GS25를 조연으로 한 안티-페미니즘 코미디 극장으로 돌아가 보자. ‘쿵쾅쿵쾅’ 분노한 것은 누구인가? 원인과 결과 사이에 잘못된 인과를 설정한 젊은 남성들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구성된 성차를 무시한 채 자신의 억울함을 왜곡된 방식으로 토로한 ‘이남자’들에게도 웃음거리가 될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들만을 웃음거리로 삼아선 안 된다. 브라이도티는 “이원론적 사고 양식은 오직 권력 관계라는 위계적인 저울 속에서 이항적인 차이들을 규정하고자 차이들을 창출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앞서 설명한 ‘차이의 정치’의 반대편에 있다.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보고자하는 사람들, 그들이 이 극장을 채운다.





  그렇다면 누가 이들을 호명했는가? 우리 정치는 ‘이대남’을 단지 연령과 성별로 묶어 젠더 이슈의 선봉대장으로 삼아 차기 대선의 표심을 이끌 주인공으로 생산하는 중이다. 또 우리 언론, 미디어는 ‘이남자’와 ‘이여자’를 자극함으로써 클릭수를 높여줄 소비자를 확보한다. 이들이 이 코미디의 연출자들인가? 그러나 여기엔 이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이분법적 관점으로 사회를 파악함으로써 더 쉽다고 느껴지는 것에 자족하는 우리 자신들이 있다. 우리는 혹시 젊은 남녀의 비극적 조건을 활용해 연출한 이 거대한 코미디 무대를 보며 낄낄거리고 있던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 자신은 여기서 자유로운가? 질문해볼 일이다.

  그 자체로 다양하고 고유한 문제들, 그에 대한 상이한 관점들을 덜 중요한 것으로 치부하는 보편적 관점에 저항하는 페미니즘은, 그렇다면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지금의 이원론적이고 적대적인 관계는 우리 모두를 웃음거리로 만든다. 또 한 명의 동시대 페미니스트인 도나 해러웨이는 이렇게 다양한 갈등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중요한 것은 ‘책임을 지고자 하는 태도’라고 말한다. 그리고 책임지는 것은 응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가진 지성으로 상대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 이해의 시도가 실수와 실패로 귀결되더라도 다시 해볼 수 있는 연습의 관계를 맺는 것. 지금처럼 쓴웃음을 자아내는, 누군가에겐 불편하고, 누군가는 고통스러울 코미디보다, 조금 더 편안하고 감동적인 코미디를 볼 수 있다면 좋겠다. 잘해보려는 과정에서 실수를 할 때, 우리는 무해한 웃음을 터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