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다와 알페스 사이에서 차이의 정치를 묻다
차명식 (길드다)
“……내가 주장하려는 바는 정의관은 분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지배와 억압이라는 개념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분배에서 지배와 억압으로 정의의 관점이 초점 이동을 하면, 사회정의와 관련된 의사결정, 노동 분업, 문화와 같은 쟁점들이 전면에 드러나게 된다.” - 아이리스 매리언 영, 『차이의 정치와 정의』, 25-26p
이루다에 대한 글을 쓰고 겪은 일
미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이스턴David Easton은 정치를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인 분배’로 정의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 어렵지 않게 그 말에 동의할 수 있다. 정치란 분배다. 돈, 권력, 지위, 일자리, 그 외 수많은 한정된 자원들을 사회 구성원들에게 알맞게 분배하는 과정, 그것이 정치다. 그리고 그 ‘알맞음’을 통해 정의가 구현된다. 강자라고 해서 많은 몫을 분배할 것인가? 약자라고 해서 적은 몫만 분배할 것인가? 아니라면,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정치와 정의의 문제이며, 우리는 분배의 길을 통해 올바른 정치와 정의의 구현을 꿈꾼다. 그러나 지금 나는, 최근 직접 겪고 목도했던 어떤 사건들을 통해 이 익숙한 인식에 대해 의문을 던져보려 한다.
얼마 전, 웹상에서 인공지능 프로그램 ‘이루다’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이루다’는 유저가 거는 말을 키워드로 포착해 그에 어울리는 적당한 대답을 돌려주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이다. 이루다는 대화 데이터를 수집해 점차 더 정교한 대화를 구사할 수 있게 되는 학습 능력을 내장했으며, 더 실감나는 인물상을 구현하기 위해 ‘20대 여성 인공지능’이라는 컨셉으로 개발되었다. 그런데 일부 남성 유저들이 이루다에게 성적인 키워드가 포함된 대화를 반복적으로 시도하여 성적인 내용이 담긴 대화를 학습시키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일각에서는 해당 유저들이 ‘A.I 여성’에 대한 ‘성희롱’을 했다며 문제를 제기했고, 이는 곧 논란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루다를 둘러싼 이 일련의 논란에서 나는 몇 가지 놀라운 지점들과 질문들을 포착했다. 가령, 적어도 ‘살아있는 것’은 명백한 동물들의 ‘동물권’조차 아직 논쟁의 대상인데 단지 초보적인 수준의 인공지능 프로그램인 이루다는 어떻게 이미 ‘인권’이 있는 것처럼 다루어지는가? 또, 자의식이나 자신의 신체가 부재하는 이루다는 어떤 맥락 속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여성’으로 정의될 수 있는가? 또, 이 사건이 ‘성희롱’으로 다루어질 수 있다면, 만일 개발사에서 이 논란을 이유로 이루다를 폐기할 경우 그것은 ‘살인’으로서도 다루어질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물론 젠더 문제의 영역을 포함하지만 보다 핵심적인 내용은 언론이나 일부 네티즌들이 이루다를 다루는 방식, 즉 A.I 프로그램을 이미 하나의 인격체로서 다루는 현상의 원인과 그것이 미칠 영향에 관한 것들이다. 작년에 ‘포스트 휴머니즘’을 공부했던 나로서는 이 문제에 대해 보다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싶은 욕망이 있었고 그에 따라 나는 해당 질문들을 하나의 짧은 글로 정리해 어떤 웹사이트에 올렸다. 어떤 명확한 주장을 담은 글이라기보다는 ‘이 사건을 이런 측면으로 봤을 때 이러이러한 질문들이 가능하지 않을까, 이 질문들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눠보면 좋겠다’ 하는 발제문 형식에 가까운 글이었다.
나는 그 글을 작성하면서 특히 신중을 기했는데 왜냐하면 이루다 사건이 이미 온라인상에서 성별 간 갈등의 여러 불씨 중 하나로 소비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남성 유저들이 주류인 사이트에서는 이 사건을 페미니즘 진영의 또 다른 몽니로 받아들였고 여성 유저들이 주류인 사이트에서는 한국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의 또 다른 증거로 이해했다. 그에 비해 내 글의 요지는 성별 갈등의 구도를 잠시 떠나 이 초보적인 A.I 프로그램이 어떻게 하나의 인격체처럼 다루어지고 있는가를 살펴보자는 것이었으므로 댓글들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했다. 나는 글 서두부터 그와 같은 당부를 분명히 명시했고 그 짧은 글 곳곳에 반복적으로 비슷한 내용의 문장을 삽입해두었다.
그 결과 그 글에는 약 백 개 정도의 댓글이 달렸다. 그 백 개 중 대략 일흔 개 정도는 페미니즘 진영과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특혜에 대한 분노가 담긴 것으로 사실 내 글을 전혀 읽지 않고도 달 수 있는 댓글들이었다. (첫 댓글은 글을 올리고 거의 10초도 지나지 않아 달린 것이었으므로 본문을 읽지 않고 단 것이 거의 확실해 보였다) 심지어 이루다 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는 또 다른 ‘페미니즘 진영의 횡포’ 이야기를 가져와 분통을 터뜨리는 댓글도 꽤 있었다. 남은 서른 개 중 스물다섯 개 정도는 내 글에서 던져진 질문들에 대한 것이었지만 그 원인에 대해서는 다시 페미니즘 진영의 프레이밍으로, 그 영향에 대해서는 페미니즘 진영의 권력 확대로 분석하고 있었다. 나머지 다섯 개 정도만이 성별 갈등과 상관없는 방향에서 내 글에 대한 의견을 조심스레 쓰고 있었다.
모든 댓글을 다 읽어본 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을 읽은 사람들에게 이 글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들은 무엇을 위해 이 글을 클릭하고 댓글을 쓴 것일까?
이내 허무감이 밀려들었고, 나는 결국 그 글을 삭제했다.
그로테스크 : 점수로서의 사건들
그런데 얼마 후, 이루다를 둘러싼 논란은 또 다른 국면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이른바 ‘알페스’ 논란이 대두되기 시작하면서다.
‘알페스RPS’란 ‘Real Person Slash’의 줄임말로서 실존인물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 사이의 가상의 동성연애 관계를 설정하고 묘사하는 창작물들을 의미한다. 가령 남자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서로 동성연애를 한다고 상상하면서 그 내용을 소설 등으로 쓰는 행위가 이에 해당한다. 한국에서의 알페스는 한국 아이돌 문화 태동기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창작물에 따라선 매우 높은 수위의 노골적이고 가학적인 성애를 묘사하는 것도 적지 않다고 한다. 본디 이 문화는 음지에서 암암리에 이어져왔는데, 래퍼 ‘손 심바’가 이것은 해당 인물들에 대한 명백한 성희롱 행위라고 주장하면서 논란이 커지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 알페스 논란이 이루다 논란으로부터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불거졌다는 것이다. 곧 이 두 사건은 언론과 일부 네티즌들을 통해 매우 자연스럽게 엮이기 시작하는데, 여기서 눈여겨볼만한 것은 그 두 사건이 엮이는 방식이다. 일각에서는(특히 일부 남성들) 알페스 논란에 대해 “이루다를 문제 삼았던 것처럼 알페스도 문제 삼으라”고 요구한다. 또 일각에서는(특히 일부 여성들) “알페스와 이루다가 같은 급에서 논의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뒤이어 이 사건은 그보다 앞서 있었던 N번방 사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한편에서는 “N번방과 알페스를 다루는 태도가 왜 이렇게 다른가”를 따지고, 다른 한편에서는 “N번방과 알페스를 어떻게 같은 급으로 치부할 수 있느냐”며 분개한다.
나는 이 현상에서 어떠한 그로테스크함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는 정작 N번방에 대해, 이루다에 대해, 알페스 자체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사건 각각의 내용에 대해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들 각각의 ‘급’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 각 사건이 얼마나 더 참혹하게 느껴지고,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며, 사회적으로 더 중요하게 다루어지는지에만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그들은 ‘급’의 비교에만 몰두하며 그 사건들에 대한 ‘평등’ 혹은 ‘차등’한 대우를 요구할 뿐이다. 마치 그 평등과 차등을 통해 정의가 실현되는 것처럼 말이다.
평등과 차등의 구도 속에 들어간다는 것은 양적 비교의 대상이 됨을 의미한다. 또한 양적 비교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그 모든 사건들이 균질화 되어야 한다. 즉, 이런 뜻이다. 한국 사회의 젠더 문제에 있어 N번방 사건은 -1000점에 해당하는 중대함을 갖는다고 하자. 이루다 사건은 -200점에 해당하는 중대함을, 알페스는 -150점짜리 중대함을 갖는다고 하자. 이제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왜 N번방은 -1000점인데 알페스는 -150점인가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는 알페스를 -500점으로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누군가는 알페스는 명백히 더 낮은 점수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오직 각 사건에 어떤 점수를 매기는가를 가지고만 다투는데 왜냐하면 더 많은 점수를 상대에게서 빼앗을 때 사회적 정의가 실현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N번방, 이루다, 알페스 사건이 각각 어떤 맥락 속에서 발생했으며 어떤 배치가 그와 같은 일을 가능케 했는가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그것들이 각자 갖고 있는 제각기 다른 원인과 특성, 영향도 관심사가 아니다. 심지어 그 피해자들의 고통조차도 그것이 얼마나 참혹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만 유의미하다. 그 사건들 사이에 존재할 수많은 차이들은 다만 오직 점수로 환산되면서 의미를 상실한다.
이러한 ‘점수로서의 환산’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익숙한 논란들을 새삼 다시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가령 군대와 임신이 각각 남성과 여성에게 주는 고통과 영향은 서로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일 텐데 왜 항상 이 둘은 서로 ‘상쇄’되는 것처럼 말해지는가? 직장과 육아의 문제는 또 어떠한가? 왜 하나의 현상이 갖는 다양한 결을 풍부하게 이해하고 해결을 위한 공동의 노력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쪽이 더 고통스럽고 모두에게 더 중요하게 여겨져야 하는가를 견주는 것만이 문제의 핵심이 되는가?
아마도 그것이 이루다 사건에 대한 내 글에 달렸던 댓글들의 정체이기도 할 것이다.
“차이의 정치와 정의”
페미니스트 철학자 아이리스 매리언 영은 그녀의 저서 ‘차이의 정치와 정의’에서 근대의 정의란 오직 평등과 차등의 정의 - 다시 말해 정해진 양을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나눌 것인가에 달린 ‘분배의 정의’라고 주장하면서, 그 분배의 정의가 갖는 한계들에 대해 지적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공적인 것들의 비정치화’ 거기서 이어지는 ‘이익집단 다원주의’다.
아이리스 매리언 영에 따르면 원래는 사적 영역에 속하던 것들이 공적인 영역으로 진입함으로써 동시에 공적인 것들이 점점 더 비정치화되는 측면이 발생한다. 즉 사회적 갈등과 논의는 오직 분배에 관해서만 국한되고 보다 근본적인 쟁점들에 대한 문제제기는 전혀 이뤄지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시민들은 고객-소비자, 다시 말해 철저하게 사적 존재로 규정되고, 사회와 정치란 다양한 사적 이익집단들이 제한된 자원의 획득을 위해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 경쟁하는 장으로 변화한다. 이것이 ‘이익집단 다원주의’다.
이러한 ‘이익집단 다원주의’의 갈등 해결 과정에서는 정의나 옳음에 대한 규범적 주장과 이기적 주장이 전혀 구분되지 않고, 옳음이나 정의를 말하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말하는 이들로 여겨지며, 이것은 곧 정치적 냉소로 이어진다. 이러한 현상들은 공적인 것의 인식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그 개념 자체를 소멸시킨다. 소위 사회적 문제라 하는 것은 사회의 공통의 문제가 아닌 각 이익집단의 문제가 되고, 정책 역시 시민들을 하나의 공적인 집단으로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이익집단의 구성원으로 포착한다. 이 과정 속에서 제도화된 이익집단들을 위한 공권력의 창출 - 이른바 프랜차이즈 국가 개념이 나타난다. 이제 국가 정책은 공적 토론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부 기관과 민간 이익집단의 협상 속에 만들어진다. 선거 -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정치는 그 자체로 이미 두 진영의 명운이 달린 심판의 칼춤, 한쪽에 살고 한쪽이 죽는 서바이벌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위에서 나는 이루다와 알페스를 통해 주로 젠더의 영역을 다루었다. 우리 사회에서 젠더 문제는 이미 빠르게 영의 분석을 따라가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젠더 문제는 빠르게 정책의 영역에 파고들었고, 그 과정에서 분배의 문제로 전환되었으며, 점점 더 남성 진영과 여성 진영이라는 두 ‘이익집단’이 자원 분배를 놓고 다투는 대결의 양상을 띠게 됨으로서 역으로 공공성을 잃어가고 있다. 하지만 말할 것도 없이 이 모든 현상은 비단 젠더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치적 신념, 세대, 국적, 인종, 종교, 그 외에도 온갖 집단이 저마다 이익 집단으로서 자원의 분배를 놓고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다투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건과 현장들은 ‘점수’로 환산된다. 우리는 그 안에 담긴 것을 심도 있게 이해하기보다, 그것이 몇 점짜리가 될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다.
만일 우리가 여기서 어떤 전환점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얼마 가지 않아 ‘적들’, 아니, 나와 다른 정체성을 갖고 다른 의견을 말하는 상대와 대화하는 방법을 영영 잊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선물을 말할 때조차 그것을 무기로 받아들일 것이고, 그는 단순히 어떤 협력의 기회를 놓치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결국 세계의 변화를 들여다 볼 능력의 상실을 의미하게 될 것이다. 그 뒤로는 존재하지 않는 몫을 위해 무지 속에서 발버둥 치며 서로를 물어뜯으려 드는 운명만이 남는다. 그 운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지금 분배의 정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의를, 그 정의를 이룩할 새로운 정치를 발명해야만 하는 분수령에 서 있다. 사건과 현장 하나하나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정의. 그것들의 차이를 포착할 수 있는 정의. 그 차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함께 변화시켜 공공에 이르는 정의. 아이리스 매리언 영은 그것을 바로 ‘차이의 정치와 정의’라고 불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