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마지막 날, 얼굴 없는 청중들과 함께
차명식 (길드다)
지난 12월 31일, 2020년의 마지막 날. 이른 점심을 먹고 마을버스에 올랐다. 집 근처의 고등학교에서 청소년과 책을 주제로 한 강의를 맡게 되어서였다. 학교 도서부와 교지발행부 등 서른 명 남짓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였는데 원래는 늦어도 11월 중에는 하기로 되어있던 것이 코로나 탓으로 계속 일정이 밀린 결과였다. 강의는 당연히 비대면으로 하기로 되어 있었다. 아무튼 이 때만 해도 코로나 감염자가 하루 천 명 단위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으므로 비대면으로나마 하게 된 것도 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빌라단지 끝자락에 위치한 학교는 아담한 크기였고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본관 문을 통해 들어갔더니 로비 중앙에 놓인 테이블과 무언가 안내하시고 계신 것 같은 아주머니 두 분이 보였다. 일전에 도서관엘 갔다가 입구에서 체온을 측정하고 입장 기록을 썼던 것이 기억나 혹시나 싶어 다가가 여쭤봤다. 그러나 알고 보니 두 분은 내년도 신입생들을 위한 안내 자료를 나눠주시고 계신 분들이었다. 멋쩍게 고개를 숙이고 올라가는 계단을 찾아 두어 층을 더 올랐다. 층계를 오르고 약속 장소인 도서실을 찾아 돌아다니는 와중에도 사람은 한 명도 마주치지 못했다. 마치 로비에 계셨던 두 분을 제외하곤 학교 전체에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았다.
‘규장각’이라는 이름의 도서실을 찾아 문을 열었을 때는 강의 시작까지 대략 20분 정도가 남았을 즈음이었다. 혹시나 여기도 비어있으면 어쩌나 걱정을 했지만 들어서자마자 선생님 두 분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아마 두 분은 내가 오기 전까지 강의 세팅을 하고 계셨던 듯 PC를 계속 조작하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무언가 중간 중간 막히는 것이 있는 듯해 슬쩍 화면을 들여다보니, 어라, 화면에 떠 있는 프로그램은 줌Zoom이 아니었다. 구글 미트Google Meet라는, 일전에 회의 때 이름만 들어본 또 다른 화상 프로그램이었다. 선생님들도 줌에 비해 구글 미트를 좀 낯설어 하시는 것 같았지만 큰 문제없이 준비가 끝났다. 선생님들과 날씨 이야기며 길드다에 대한 이야기 등을 잠시 나누다가 시간이 되어 강의를 시작했다.
사실 강의 내용 자체는 나의 책 『책 읽습니다』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어서 뭔가 중간에 크게 막혔다거나 아주 새로운 이야기를 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독특했던 점은 강의에 접속한 아이들 모두가 각자의 화면을 끄고 강의에 임했다는 것이었다. (이 학교에서는 비대면 수업 때 그런 경우가 잦다고 했다) 즉, 아이들은 모두 내 화면과 내 얼굴을 보고 있지만 나는 아이들의 얼굴을 전혀 볼 수가 없는 상태에서 강의를 진행하게 되었다.
이게 상당히 묘한 기분이었다. 일반적인 강의는 아니고, 어쨌든 아이들은 내 얼굴을 보고 있으니 라디오 방송하는 것과도 다르고……굳이 따지자면 현장 관중 없이 진행하는 인터넷 강의와 비슷한가? 보통 강의에서 발생하는 ‘시선의 비대칭’은 강사가 모든 청중을 바라볼 수 있는데 비해 청중은 대개 강사 한 사람만 바라보는데서 발생하는, 강사 쪽에 기울어진 비대칭인데 이건 그와 달리 나는 전혀 청중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청중들은 나를 볼 수 있다는 점이 생경했다. 불쾌하다거나 하는 느낌은 전혀 없었지만 청중의 반응을 살펴가면서 강의 템포를 조절할 수 없다는 점이 약간 답답하기는 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정해진 시간 내에 강의를 마쳤고, 질의응답도 꽉 채워서 마무리를 했다. 학생들의 반응이야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선생님들은 꽤 만족하신 것 같았다.
선생님들께 인사를 드리고 조용히 도서실을 나왔다. 이번에는 나올 때 로비를 거치지 않았는데 학교 정문을 나설 때까지 정말 단 한 사람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결국 오늘 학교에 와서 내가 직접 만난 사람은 로비에서 마주친 두 분, 선생님 두 분까지 해서 총 네 분이 다였다. 그럼에도 서른 명이 넘는 사람들을 상대로 한 강의를 마쳤다는 게 사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비대면 강의를 해도 얼굴을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 사이에는 이 정도의 차이가 있구나 하는 것을 새삼 실감하면서, 또 2021년에는 이와 비슷한 경험들이 얼마나 더 이어질까 생각하면서, 나는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2020년의 마지막 하루를 그렇게 마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