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에 대비하십시오

김지원






또 한 번의 힘겨운 전쟁


   확진자 증가세가 심상치 않다. 언론과 전문가들은 이를 두고 ‘겨울철 3차 대유행’이라 말한다. 정부는 다시 ‘사회적 거리두기’를 2.5단계로 격상했고, 3단계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지난봄과 여름에 이어 코로나와 또 한 번의 힘겨운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11월 24일)”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트윗에 묘한 느낌을 받는다. ‘무엇무엇과의 전쟁’이라는 표현은 참으로 비장한 말이다. 지금처럼 중차대한 상황에 사용될 법한 적절한 은유다. 테러와의 전쟁, 빈곤과의 전쟁, 질병과의 전쟁… 이 같은 은유들은 강력한 힘을 가진다. 제대로 된 자세로 그것과 싸워 반드시 이기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모두에게 그것과 제대로 싸울 ‘아군’이 되기를 요청한다. 그러한 의지를 밝히고, 동참할 것을 요청하기 위해 세계의 리더들은 너나할 것 없이 이것이 전쟁임을 누차 강조한다. “우리는 서로가 아닌, 바이러스와 전쟁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11월 26일, 추수감사절 연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쟁의 은유 속에서 신천지, 이태원 클럽, 광화문 집회, 다시 이태원 핼러윈, 이들은―적어도 주요 포털 사이트의 기사 댓글 창에서는―싸워 이겨야 할 적이 되었다. 아니, 이들은 처음부터 적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트윗이 묘한 느낌을 주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신천지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이들 세대와 나는 불안함이라는 사회적 조건을 공유한다. 나는 또한 다양한 성 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보다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기를 바라는―혹은 그저 놀고 싶은―이태원의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다. 물론 난 광화문 집회 참석자는 아니지만, 문재인 정부의 입장에 찬성하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다. 나는 이 은유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보다는―역사적으로 대부분의 ‘무엇무엇과의 전쟁’이 그러했듯―우리 자신이 전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럼에도 전쟁의 은유는, 일단은 효과적인 듯하다. 팬데믹 상황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일치단결 또한 어쩌면 그 효과처럼 보인다. 『은유로써의 질병』을 쓴 수전 손택에 따르면 “전쟁은 우리가 실용성과 경비를 고려하지 않아도 되게끔 하는 거의 유일한 활동” 중 하나다. 말인즉, 이 은유는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 중 가장 취약한 자들을 보호하는 일의 불가피한 비실용성을 정당화하도록 돕는다.” 집단적인 의식을 고취시킴으로써 한편에선 빠르게 적을 색출하고, 다른 한편에선 보호의 대상을 확정한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세계를 신속하고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는 적(敵)-아(我)의 이분법이 들어선다. 뚜렷함에 감응한 우리는 이러한 은유에 지지를 보내고, 동참하게 된다. 그러나 손택은 지적한다. 이분법이 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들은 사실 이분법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될 뿐이라고. 구원의 대상은 취약한 자들도, 우리도 아닌, 이분법 그 자체라고.




 

세계는 그런 식으로 신속하고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적군과 아군, 즉 적/아의 구분은 사람들 사이의 미시적 차이를 간과한 채 너무 쉽게 모든 것을 이분법적 차이로 환원한다. 이 구분을 통해 세계를 파악할 때 우리는 사람들이 놓여있는 다양한 상황과 조건들을 고려하기보다는 이미 사회적으로 구성되어 온 ‘정상성’의 범주를 활용한다. 예컨대 코로나 1차 유행 이후 ‘신천지인지 아닌지를 알아내는 간단한 방법은 “이만희 개새끼”를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는 농담이 유행했다. 이것이 농담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이미 신천지가 이상한 집단이고 그런 농담거리로 삼아도 싸다는 암묵적인 합의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농담을 주고받는 우리 대부분은 사실 신천지가 어떤 곳인지조차 잘 알지 못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이러한 농담의 효과는 신천지라는 집단을 둘러싼 다양한 맥락을, 가령 우리가 그렇게나 혐오하는 신천지 신도가 어떻게 30만 명이나 될 수 있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우리는 차이들에 대해 알고자하기보다 우리가 의심하지 않고 믿어왔던 옳고 그름을 강화시킨다. 이태원이나 광화문 집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자. 신천지를 확인하는 이러한 방식의 농담은 정부를 불신하는 집단의 이른바 ‘대깨문’ 색출이나, K-방역에 대한 자부심을 묻는 설문조사와 동일한 원리를 가진다. ‘K-무엇’에 애당초 해당되지 않았던 사람들, 예컨대 외국인 노동자나 성소수자들은 처음부터 안도감보다는 두려움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그들에겐 이중의 두려움이 엄습한다. 바이러스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과,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말 그대로 무조건적으로 적으로 낙인찍힐 것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이렇게 볼 때, 어쩌면 코로나 바이러스가 이들을 통해 집단감염을 일으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미 ‘비정상’으로, 앎과 이해의 영역 바깥으로 몰려있던 이 사람들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기에 방역수칙을 받아들일 이유도 없었다. 광화문 집회 이후 “이 모든 것이 음모”라며 병원에서 도망친, 이른바 ‘개독교’라 불리는 확진 환자들. 그들은 코로나가 확진된 이후에 도망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이미 도망 중이었다. 그런 점에서 의료진과 간병인들을 포함한 각종 돌봄의 더 강도 높은 노고 외에 ‘K-방역’에는 새로움이 전혀 없다.

   이태원발 감염 이후 “혐오를 멈추자”는 방역당국의 호소는 적합해 보인다. 그러나 이 역시 전쟁이 서로를 향해서는 안 된다는,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를 향해야 한다는 바이든 당선인의 주장과 같은 맥락의 것이라면, 여전히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문제들이 남는다. 신천지를 적으로 만듦으로써 차이를 환원하고 질문을 사라지도록 만드는 효과와 마찬가지로, 코로나 바이러스를 적으로 만듦으로써 이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오기까지 일어난 일들, 보다 근본적인 원인들에 대해서는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마스크를 쓴다. 사회적 거리를 강화한다. 그뿐이다. 그러나 코로나 초기부터 이미 많은 동물권운동가들, 환경단체들이 지적해왔듯 코로나-19는 우리 자신들, 인간들의 행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숲을 베고, 박쥐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몰아내는 일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벌어지고 있다. 그러니까 적/아의 구분은 전쟁의 은유가 제시하는 것처럼 쉽지가 않다. 세계는 그런 식으로 신속하고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처럼 급박한 상황에,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해야 하는 걸까? 전쟁의 은유를 폐기해야 하는 걸까?

 




평화는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2007년 봉기에 관련한 책 한 권을 냈다는 이유로 프랑스 첩보 기관에 의해 대-테러 작전의 대상이 되었던 프랑스 산골짜기 타르낙의 아나키스트 그룹 ‘보이지 않는 위원회’1)는 그야말로 테러와의 전쟁의 희생자이자 명백한 국가의 적이었다. 이후 7년간의 재판에서 무죄를 받은 이들은 호기롭게도, 그 해 새롭게 펴낸 책 『코뮨이 돌아온다』에서 ‘전쟁’을 달리 생각하자고 제안한다. 이들은 전쟁에 관한 우리의 학습된 편견을 문제 삼는다. 전쟁을 오직 서구적, 군사적, 이분법적 상상력―“전쟁=무장대결=대량학살”이라는 등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진짜 문제라고 말이다. 이러한 전쟁의 상상력은 서구, 그 중에서도 고대 그리스에서 비롯한 ‘변종 전쟁관’이다. “페르시아인들이 매우 효과적이지만 보병의 생명을 무로 돌리는 [그리스의 이러한] 전쟁 수행 방식에 직면했을 때, 그들은 이를 완전히 야만적이라고 평가했다. …그 후에 서방 군대가 짓밟아야 했던 수많은 다른 적들의 평가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위원회는 서구에서 결정적 충돌 상황에 양보를 택하지 않고 최대한도로 죽음을 택하는 쪽에게 승리를 인정해주던 바로 그 무렵에, 동양에선 때로 싸우지 않는 것을 최선이라 여기기도 했다는 점을 강조한다.2) “다른 곳에서는 전쟁의 규범인 것을 서구에서는 ‘비정규전’, ‘심리전’, ‘작은 전쟁’, ‘게릴라전’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바로 이 변종성의 한 측면일 뿐이다.”

   이들이 재-전유하고자하는 전쟁이란 군사적인 것들, 이분법적인 것들로 ‘축소’되지 않으며, 경계가 불분명한 우리 자신이 삶에서 겪는 수많은 마찰들과 마주침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때 전쟁은 은유가 아니라, 우리 삶의 작동 방식이다. 그들에 따르면, “전쟁은 대량 학살이 아니다. 그것은 이질적 역량들의 접촉을 주재하는 논리이다. 전쟁은 도처에서, 수없이 많은 형태로, 대개의 경우 평화적인 수단으로 벌어진다. 다양한 세계들이 있다면, 환원 불가능한 복수의 삶의 형식들이 있다면, 그때 전쟁은 그 다양한 세계들, 그 복수의 삶의 형식들이 이 땅에 공존하는 법칙이다…평화는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들은 다소 과격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대문자 정치Politic로, 이른바 ‘공학적’이라 불리는 숫자놀음으로 환원되는 가짜 평화에 반기를 든다―이 또한 고대 그리스의 산물로, 밀집대형의 최전열에서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웅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아테네 농민은 평의회에 참여하는 유권자 시민의 다른 얼굴이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존재를 건 전쟁주의, 이해관계와 손익을 넘어 다양한 의견들과 공동체들이 맞부딪히는 전장(戰場)만이 팬데믹을 포함한 다양한 재난과 불행들에서도 우리에게 이에 맞설 역량을 제공한다. 

   이것은 우리 몸 밖에서 벌어지는 전쟁뿐 아니라, 우리 몸을 전장으로 펼쳐지는 일들에 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 『면역에 관하여』에서 율라 비스는 전쟁의 은유에 대한 손택의 회의에 공감하며 면역학계에도 전쟁의 은유가 남발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자신이 한 면역학 교수에게 들은―그런 남발들과는 다른―인상 깊었던 강의를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그 강의에서 떠오른 하나의 서사란 게 있다면, 그것은 면역계와 그것이 공진화하는 병원체들이 상호 작용을 벌이는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는 가끔 진행 중인 싸움으로 묘사되곤 하지만, 그렇더라도 어차피 헬리콥터와 무인 드론이 동원되는 싸움은 아니다. 그것은 그보다 재치를 겨루는 싸움이다. <그러자 바이러스는 더 똑똑해져서, 천재적인 꾀를 냈습니다. 우리 전략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맞선 겁니다.> 교수는 이런 식으로 말했다. 그의 이야기에서, 우리 몸과 바이러스는 치명적인 체스 게임에 푹 빠져서 서로 겨루는 두 지성이었다.” 이 게임에는 승패도, 적/아의 뚜렷한 구분도 없다. 다만 끝없이 겨루는 두 지성과, 공진화가 있을 뿐이다.

 




우리들 사이의 내전을 포함해서


   그렇다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위원회를 따라, 혹은 바이러스와 면역계를 따라 어쩌면 우리 모두를 대량학살로 이끄는 군사적 은유에 대항하여 진짜 전쟁을 펼쳐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러한 전쟁은 무엇일까?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로운 전쟁이란 ‘내전을 포함하는 것’이다. “내부 갈등이 생길 때 그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구체적인 전략을 수립하는 데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운동이 활력을 잃지 않고, 본질적 물음들을 열어두고, 제때에 필요한 변위를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가 내전을 감수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우리가 삶에 대해 가지는 관념과 양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태로운 이분법을 유지하는 데에 모든 힘과 권위를 동원해 차이를 소거하는 은유로서의 전쟁과 달리, 이 전쟁은 우리들 사이의 갈등을 전제로 삼는다. 언제나 존재하는 우리들 사이의 내전을 밀어내지 않고 그대로 포함하는 것.

   일례로 국내의 연구자들이 팬데믹 이후 엮은 책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에는 흥미로운 글들이 많은데, 그중 신천지를 다룬 파트가 있다. 이 파트는 신천지를 우리가 흔히 아는 ‘사이비’ 혹은 ‘이단’이 아니라, 사회적 기대와 개인적 욕망이 늘 어긋나는 이삼십 대의 불가피한 세대적 조건 속에서 다루고 있다. 국내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쓴 『코로나 시대 페미니즘』에선 이태원 발 코로나 유행과 강남의 노래방 발 전파를 보도하는 언론의 행태를 조목조목 비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으레 가지게 되는 어떤 편견들에 문제를 제기한다. 이런 논쟁의 지점을 가감 없이 제시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을 발견하고 우리의 시각을 변화시키게 된다. 발화함으로써 나 자신과 상대방을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상태로 머물지 못하도록 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도 이미 코로나-19 팬데믹은 그러한 종류의 전장이다. 얼마 전 온라인 강의를 10분 앞두고 편의점을 간다는 친구가 사다 줄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목이 타 급하게 “물!”을 외쳤다. 다음날 다른 한 친구가 코로나와 관련한 세미나에서 ‘몇 발자국만 가면 정수기가 있었다.’며 급박한 상황에서 우리가 내리게 되는 결정들, 페트병에 담긴 물을 사먹는 행위에 대한 은근한 비판을 했다. 팬데믹 이후 바이러스의 변이는 결국 인간의 야생동물 서식지 침탈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우리는 기후 위기나 환경 담론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한 공부의 연장에서 서로의 실천들을 점검하도록 하는 일은 때로 서로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그것을 지속하는 일.



   이 전쟁들은 사소한 문제들을 사유의 장으로 끌어들이며 일상을 변화시킨다. 이 전쟁들은 모든 의심되지 않은 지식에 반기를 들고, 나 아닌 것들과 경연하고, 결연한다. 레베카 솔닛이 말했듯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기도 하다. 그는 동명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잔학함에 대한 저항은 그 잔학함을 숨기는 언어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한다.” 언어의 전쟁, 그것은 『마스크가 말해주는 것들』을 엮은 추지현의 말처럼 우리가 너무나 자연스레 ‘뉴노멀’이라 부르는 것들을 ‘노멀’로 후퇴시켜 다시 사유하는 일, 문 대통령과 바이든이 말하는 ‘전쟁’을 재전유하는 일일 것이다. 이 전쟁은 달리 사유와 토론이다. 사유와 토론이 없는, 맹목적인 우리를 생산하는 발화들과의 전쟁, 때론 맹목적인 욕망에 사로잡히는 나 자신과의 전쟁이다. 그러나 이것은 혼자만의 전쟁이 아니다. ‘우리’의 전쟁이며, 우리는 ‘절멸’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위원회 혹은 바이러스가 그러하듯이, ‘전염’을 목적으로 한다.

   가장 급박한 것은 코로나와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가 그간 무시하고 피해온 수많은 내전들이 아닐까? 더 늦기 전에 이제라도 우리들 사이의 전쟁을 벌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질문들 속에서, 우리는 다음의 지침을 말한다 :  “내전에 대비하십시오.”






1) 줄리엥 쿠파(JULIEN COUPAT)가 이끈다고 추정되는 익명의 혁명가 집단으로 ‘타르낙의 9인’이라고도 불린다. 그 전에 티쿤(TIQQUN)이라는 이름으로 1999년과 2001년 두 차례에 걸쳐 잡지를 발간했는데 거기에 실렸던 소논문들은 『블룸 이론』(2004), 『내전 개론』(2006), 『이것은 강령이 아니다』(2006) 등의 단행본으로 재출간된다. 이후 ‘보이지 않는 위원회’(COMIT? INVISIBLE)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다가오는 봉기』(국역본 제목은 『반란의 조짐』, 2007), 『코뮨이 돌아온다: 우리 친구들에게』(2014), 『지금』(2017) 등의 책을 발표했다. 여기서 말하는 사건은 『다가오는 봉기』와 관련되어 있다.


2) 『손자병법』, 제 3편 모공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이 최선이 아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야말로 최선이다. …용병에 능숙한 자는 싸우지 않고 상대를 굴복시키고, 공격하지 않고 성을 무너뜨리고… 이것이야말로 꾀로 싸우는 방법이다.”





 * 본 텍스트는 12월 24일에 열린 청년 단체들의 네트워크 모임 ‘2020 비학술적 학술제’에서 발표된 에세이 중 일부입니다. 이 학술제에서 길드다는 우리 삶에 갑작스레 들이닥친 ‘뉴 노멀’의 현실을 살기 위한 가이드로서 네 가지 지침―1. 내전에 대비하십시오, 2. 얼굴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3. 당신의 연인은 여기서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4. 이단을 향해 항상 열려있으십시오―을 제시하였습니다. 이 텍스트는 길드다 김지원이 작성한 그 첫 번째 지침입니다. 다른 글은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습니다. (www.forumnotfor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