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로워 100명이지만, 여전히 힙합하고 있습니다.

송우현 (길드다)






래퍼가 되는 방법


  래퍼가 되는 법을 알고 있는가? 5-6년 전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생각한 방법은 ‘학교를 그만두고 홍대에 가는 것’이었다. 고등학교나 대학 진학이 래퍼의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없고(그리고 ‘자퇴’라는 타이틀은 멋있고ㅎ), 한국 힙합의 성지인 홍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공동체(크루 등)에 소속되는 게 곧 ‘언더그라운드’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 ‘언더그라운드’에 속하려고 하는가를 물었다면 “그게 힙합이니까.”라고 답했을 것이다. 아마도 자신의 음악을 날것으로, 산업이나 자본이 곁들여지지 않은 채로 보여주는 게 힙합다운 움직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솔직히 당시에는 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래퍼가 되겠다는 추상만 가지고 있었을 뿐, 래퍼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해 전혀 상상해보지 못했다. 무엇보다 난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었으니까. 


  수년이 흐른 지금, 나는 메이저는커녕 언더그라운드에서도 알아주지 않는 팔로우 100명대의 무명 래퍼가 되었다. 고등학교를 자퇴한 뒤에는 래퍼를 빙자한 백수 생활을 했고, 지금도 여전히 음악만으로는 삶을 지속할 수 없는 상황이다. 홍대에서 생활할 여력은 없고, 힙합크루를 만들 수 있는 기반도, 의지도 없다. 부모님의 돈과 아르바이트비를 보태서 산 장비들과 저예산의 무료 공개 앨범 몇 장이 전부이다. 이런 나와 비슷한 상황의 청년은 몇이나 될까? 코로나 시국에도 어김없이 시작한 <쇼미 더 머니 9>의 참가자 수가 약 2만 3천여 명이라는 것을 보면 결코 그 수가 적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는 운이 좋게도 조금 다른 래퍼의 삶을 살고 있다. 자퇴 이후 인문학 공동체를 만나며 ‘문탁네트워크’와 ‘길드다’에서 인문학을 공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여 꼭 음악이 아니더라도, 힙합과 인문학을 엮은 글을 쓰고 강좌를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힙합과 인문학을 엮은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되었다. (내가 인문학을 만나고, 래퍼가 된 자세한 이야기는 길드다 블로그에 올라와있는 글을 참고해주시라. https://guild.tistory.com/367?category=753611) 




힙합에도 공부가 필요하다


  프로그램의 문제의식은 이랬다. 힙합은 청년들 사이에서 빠질 수 없는 대중문화로 자리 잡았고, 아홉 시즌을 쉬지 않고 달려가는 <쇼미 더 머니> 덕에 그 열기는 식을 줄 모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힙합은 문제적인 문화로 여겨지며 다양한 비판을 피해가지 못하고 있다. 특히 페미니즘 진영에서는 여성들의 성 상품화를 남발하고, 폭력적인 이미지를 중시하는 남성 중심적 문화라며 힙합을 강하게 비판한다. 또한 힙합에서 이야기하는 ‘성공’과 ‘돈 자랑’의 서사는 개인의 성공을 물질주의적, 개인주의적으로만 귀결시킨다는 비판도 받는다. 그러나 정작 래퍼들이나 힙합을 소비하는 팬들은 이런 비판에 대해 쉽게 수용하지 못하는 경향을 가진다. ‘그게 힙합이야. 뭐 어쩔 건데.’ 라며 묵인하고, 페미니즘 진영과 대립하는 구도를 만들어 이분법적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게끔 만든다. 정작 그들도 정말 힙합이 ‘원래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면서 말이다. 




  대표적으로 내가 그러했다. 힙합을 사랑하지만, 힙합에 대한 비판들을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 몰라서 방황했다. 비판적인 면들을 수용하면서 힙합을 쉽게 버리고 싶지도 않았고, 페미니즘 진영을 무시하면서 힙합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한동안은 내 음악을 힙합이 아닌 ‘랩 음악’이라고 정의하기도 했었다.) 그러다 문득 힙합을 공부하지 않으면서 내가 계속 힙합과 랩을 지속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힙합의 역사와 탄생 배경부터 힙합이 가진 문제의식들을 돌아보는 커리큘럼을 만들었고, 세미나를 열었다. 나와 비슷한 고민 지점을 가진 래퍼나 힙합팬들은 분명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힙합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페미니스트들도 함께 공부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럴 수가, 아무도 신청하지 않았다. 얼마 있지도 않은 내 주변의 힙합팬들과 래퍼들은 ‘무슨 힙합을 공부하냐’며 무시했고, 페미니즘에 관심 있는 친구들은 애초에 힙합이라는 주제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내 문제의식을 잘 담아낸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했지만,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내 앨범도 항상 비슷한 방식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망한 게 아닐까ㅎ 듣는 이의 니즈보다는 나의 니즈를 더 신경 쓰기 때문에...) 폐강을 겸허히 받아들이려는 찰나에, 기적적으로 관심을 보인 선생님이 나타났다. 그분은 성남에 위치한 지역아동센터인 ‘함께 여는 청소년 학교’(이하 함청)에서 근무하시던 선생님이었다. ‘함청’에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로 이루어진 힙합동아리가 있는데, 그 친구들이 건강하게 문화를 소비하고 있는지 걱정이 된다며 연락을 해 오신 것이다! 선생님들은 힙합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보니 친구들과 소통하기 힘들고, 친구들이 키워나가는 ‘힙합정신’이 걱정되신 모양이었다. 나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고, 나 또한 고등학교 때 힙합동아리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잘 소통할 자신도 있었다. 결국 프로그램은 기적적으로, 기존에 기획했던 세미나 대신 강의 형태로 진행하게 되었다.




래퍼들의 현실과 꿈


  ‘함청’에서 만난 친구들은 마치 5년 전의 나를 보는 듯했다. 이상할 정도로, 내가 속해있던 힙합동아리와 비슷했다. 다들 <쇼미 더 머니>로 힙합을 접했고, 대부분 가난하고 어려웠던 시절부터 ‘랩 스타’로 성공하는 래퍼들의 서사에 반해 랩을 시작했다고 한다. 랩만 곁들인 메이저 시장보다 ‘힙합의 서사’가 있는 언더그라운드 래퍼들을 동경하고, 래퍼를 진지하게 장래희망으로 생각하며 가사를 쓰고, 음원을 만드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그들도 힙합이 비판받는 지점이나, 흘러온 역사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 때와 확연히 다른 건 바로 랩 실력이었다. <쇼미 더 머니>와 힙합의 흥행으로 인해 전 국민의 랩 실력이 상승한 걸 실감했다. 들어온 곡들을 바탕으로 가사 쓰는 법을 감각적으로 알고 있었고, 박자를 밀거나 당기는 기술들도 수준급이었다. 




  그러나 실력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랩 스타나, 랩 음악으로만 살아갈 수 있는 건 아니다. ‘뜰 수 있는 비법은 따로 있다’ 같은, 자기 개발서 같은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선택받은 소수를 제외하면 음악 시장에서 돈을 얼마나 벌기 힘든지, 현실적인 래퍼의 삶이 어떤지, 성공한 랩 스타들의 노래와 <쇼미 더 머니>가 얼마나 유혹적인지를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5년이라는 시간차가 있지만, 래퍼들과 지망생들이 놓인 환경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과거보다 래퍼들이 돈을 점점 더 많이 벌고, 더 많은 랩 스타가 탄생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풀 자체가 커진 것이기 때문에 랩 스타와 가난한 래퍼들의 비율은 전과 다름없고, 오히려 빈부 격차는 더 커졌을 것이다. 아직도 수많은 청년들이 래퍼가 되겠다며 학교를 그만두거나 무작정 음악을 시작하고, 언젠가는 뜰 거라며 아르바이트비로 음악을 만드는 인디 래퍼가 수두룩하다. 매 시즌 랩 스타의 서사를 그리는 <쇼미 더 머니>와 성공을 노래하는 힙합 곡들은 이러한 래퍼들의 현실을 볼 수 없게끔 만들며, 래퍼들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를 실력 부족으로 치부해버린다. 이러한 문제는 힙합의 근본처럼 여겨지는 ‘랩 스타의 서사’-힘들고 가난했던 시절을 랩을 통해 벗어나 물질적 성공을 이루는 서사-가 남아있는 한 해결될 수 없다. 




랩 스타를 넘어 


  랩 스타의 서사는 힙합의 근본처럼 여겨져 왔고, 이미 10년에 가까울 정도로 대중음악시장을 유지시키는 힘이 되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힙합씬이 바뀔 수 있을까? 우리는 랩 스타의 서사를 넘어 ‘새로운-힙합’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나는 강의를 준비하면서 그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이와사부로 코소의 <뉴욕 열전>을 비롯한 여러 자료를 통해 힙합의 역사를 알아보았는데, 지금 우리가 힙합의 근본, 키워드라고 생각하는 개인의 자수성가, 랩 스타의 서사는 90년대부터 힙합이 산업과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었다. 


  힙합은 흑인들의 물질적 성공이기 이전에, 70년대 후반 차별과 억압이 난무하던 뉴욕의 빈민가에서 그들을 모아주는 힘이었다. 한 개인으로서는 억압과 차별 속에서 삶을 유지해나가기 매우 힘들었지만, 함께 모여 사는 공동체 속에서는 서로를 돕고, 긍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에 중심축이 되었던 게 ‘파티’였고, ‘힙합’이었다. 여러 장르의 음악을 섞고, 반복하는 디제잉 기법으로 힙합은 시작되었고, 거기서부터 비보잉, 랩, 그라피티 등이 파생되었다. 특히나 랩은 흥을 돋우기 위한 미사여구에서부터 출발했지만, 이후 자신들이 처한 현실을 가사로 녹여내면서 힙합 음악의 파급력과 가능성을 높여갔다.


  랩-음악의 탄생부터 힙합은 단순한 동네 파티문화가 아니게 되었다. 흑인이라는 사회적 약자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이자, 그 저항의 에너지를 전 지역으로 퍼트릴 수 있는 수단으로써 작용한 것이다. 그들은 힙합이라는 음악으로 작은 동네에서부터 미국 전역의 있는 흑인들과 연대하고, 공감하며, 저항할 수 있었다. 그러한 파급력과 흑인 갱스터들의 문화가 결합되면서 거침없고 마초적인 이미지가 부여되기도 했지만, 힙합의 근본은 흑인들의 소수자성과 그들이 모여 만들어낸 공동체성, 나아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창구로서의 저항성이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힙합의 역사를 다시 보면서 새롭게 해석해내는 힙합은 현재 대립하고 있는 페미니즘 진영과도 소통할 수 있는 좋은 매개이며, 이미 음악적으로도 식상하기 짝이 없는 현대 힙합의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시장의 흐름을 한 번에 바꾸는 건 쉽지 않겠지만, 계속해서 공부하고, 다양한 실험과 저항들을 빚어내는 과정이야말로 진정한 ‘힙합’이 아닐까? 나는 계속해서 ‘힙합’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저항과 파티를 이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