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와 사이좋게 살 수 있을까…? : 기후위기와 우리의 딜레마

김고은 (길드다)






  우리 세대는 학교에서 기후위기가 문제라는 교육을 받고 자랐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험에 모두 ‘온난화’를 주관식으로 설명하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그러나 현재 지구가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왜 기후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심화만 되어온 것인지에 대한 교육은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다. 나는 최근에야 <길드다소셜리딩클럽>*에서 기후위기를 다루기 위해 공부하다가 기후위기의 심각성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했다. 이건 더 이상 피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이 남은 우리들에게 현실적 난관임이 틀림없다.


“대부분의 기후 변화 이론들은 앞으로 온실가스 배출량, 기온 상승, 해수면 상승 등의 변화가 점진적으로 일어날 것이라 추정한다. … 그런데 기후와 관련한 지질학적 기록들을 살펴보면, 기후를 구성하는 한 가지 요소의 지극히 미미한 변화가 기후 시스템 전체의 급격한 변화로 이어진 순간들이 나타났다. 말하자면, 기온이 특정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예측할 방법도 역전시킬 방법도 없는 엄청난 파괴력과 대규모 충격과 함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일단 그 단계에 들어서면 인류가 더 이상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다 해도 결코 멈출 수 없는 과정들이 전개될 것이다.”(미국 과학 진흥회의 보고서, 2014)



  솔직히 나는 이전까지 지구의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기후위기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나니 그간 살아온 삶의 방식을 돌아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몇 가지 딜레마에 봉착했다. 


* 길드다에서 진행하는 게릴라 독서모임이다. 한 가지 주제에 관하여 4주간 책을 읽고 2주간 직접 행동한다.





1. 음식, 시켜 먹을 수도 없고 해 먹을 수도 없고….


  길드다 멤버 지원은 최근에 음식배달이 불가능했던 전원주택지역에서 음식배달이 가능한 주거밀집지역으로 이사를 왔다.(아젠다 4호 참고) 지원은 집들이에서 배달음식으로 길드다 멤버들을 대접했다. 메뉴는 풍성했다. 김치찌개, 닭도리탕, 파전…. 시켜서 받고, 먹은 뒤 버리면 되니 간편하기까지 했다. 이후로도 지원은 배달음식의 다양함과 편리함에 반해 음식을 자주 시켜 먹었다. 그러다가 지원과 동거인은 어느 날 재활용 쓰레기 배출하는 날을 놓치게 되었고, 걷잡을 수 없이 쌓여가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마주했다. 자신들이 배출하는 배달음식 쓰레기의 양에 놀란 그들은 배달음식을 적게 시켜 먹자고 다짐했고 지원의 동거인은 밥을 해먹자며 장을 잔뜩 봐왔다. 하지만 재료들은 유통기한을 넘긴 뒤에야 냉장고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때 버려진 음식물 쓰레기가 용인시민 1인당 평균 배출량을 훌쩍 넘겼다고 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장마와 코로나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올해 8월, 온라인쇼핑 거래액이 14조 원대에 달했다. 그중 음식서비스는 배달음식과 도시락의 주문이 폭주하면서 거래액이 83%나 늘었다. 우리 또래에게 배달음식은 일상 그 자체다. 사람들은 개그와 드립까지 동원해가며 공을 들여 배달 어플의 음식점 후기를 작성한다. 배달 어플이 하나의 커뮤니티로 인정받게 되었을 정도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면, 일단 우리 또래들은 집에서 밥을 해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 일상적으로 밥을 해먹기 위해서는 프라이팬을 오래 쓸 수 있도록 관리하고, 양념이 떨어지지 않게 신경 쓰고, 적당한 그릇과 반찬통을 구비해야 한다. 그러느니 우리는 식사를 배달로 해결하고, 주방 살림을 꾸리는 대신 일을 하거나 여가를 즐기는 데 에너지와 시간을 사용한다. 자연히 우리에게 식사란 곧 배달음식이 된다.



  밥을 해먹는 일이나 살림을 꾸리는 일에 시간을 많이 들이지 않는 건 비단 개인들만의 현상은 아니다. 길드다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한다. 길드다에서 행사를 치를 때면 간식이나 식사도 준비해야 한다. 처음 한두 번은 음식을 직접 준비했다. 초반엔 문탁의 선생님들께 도움을 받았으나,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기만 했으므로 계속해서 부탁드리기는 어려웠다. 그 뒤로는 내가 행사 당일 일찍 와서 음식을 했다. 식사준비를 해낼 수 있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나 역시 음식을 시켜 먹자고 말하고 있다. 음식 준비가 끝나고 행사가 시작되면 내 체력이 남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길드다의 멤버는 (사장님을 제외하면) 4명밖에 되지 않으므로 한 명에게 할당되는 일의 양이 많다. 방문한 사람들을 챙기고 프로그램의 사회를 보고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계속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음식 준비를 하고나면 도저히 남은 내 몫의 일을 해낼 수가 없었다.


 오늘날 하루 배달음식에 의해 버려지는 플라스틱 쓰레기의 양은 약 830만 개라고 추정된다. 배달 쓰레기를 보며 매번 죄책감에 빠지지만, 어떤 조건에선 배달음식이 절실하게 필요해지기도 한다는 점이 나에게 딜레마로 다가온다. 





2. 대안적인 삶, 지나치게 진지하거나 핫하거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모임에 비건 채식을 하는 친구들이 있으면 트렌디한 장소(젊은 세대들 사이 입소문이 난 맛집 등)에서 만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끔 비건하는 친구들이 조금 양보를 해줄 때는 종종 그런 장소에서 만나기도 했지만, 밖에서 만날 경우 보통 구수한 장 냄새가 올라오는 한식집이 최선이었다. 요즘은 상황이 좀 달라졌다. 친한 언니가 일하는 비건 식당 두 곳은 모두 서울의 핫플레이스, 합정에 있다. 큰 홍보를 하지 않는데도 손님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장사가 잘된다고 했다. 가게는 트렌디하고 음식은 예쁘다. 얼마 전 언니가 독자적으로 합정에서 비건 팝업 식당을 한 달간 열었는데 반응이 매우 좋았다. 언니의 요리실력은 매우 뛰어나지만, 합정은 요리실력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동네는 아니다. 언니의 비건 팝업식당은 힙한 SNS 계정에 올라가면서 유명세를 탔다. 비건을 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예쁘고 힙한 비건식당을 찾고 있다.


  우리 세대는 책을 찾아보고 배움을 줄 사람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문화를 향유하지 않는다. 책 한 권보다 SNS 사진 한 장에 더 큰 영향을 받고, 그 내용을 깊이 파고드는 것보다 그것이 어떤 이미지로 비춰지는가가 더욱 중요하다. 그렇기에 비건 식당이 힙한 곳으로 인식되는 일이, 이효리가 모피 옷을 입지 않는 일이, 텀블러를 사용하는 모습을 SNS에 인증하는 일이 꽤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지구를 생각하는 이슈 역시 트렌디한 패션의 일종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지구와 함께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일도 패션이 될 수 있다니, 멋을 중시하는 나는 때때로 이런 흐름에 호감을 갖는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때때로 이 패션이 불편하게 느껴진다. 패션으로 확장되어가는 과정에서 애초에 제기되었던 질문이 사라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고기 대체식품으로 유명해진 아보카도는 비건 패션의 열풍을 타고 플랜테이션으로 경작되기 시작했고, 매년 여의도 30배 규모의 숲을 사라지게 만들고 있다. 가죽가방 대신 들기 시작한 에코백은 저렴하다는 이유로 쉽게 소비되고 쉽게 버려진다. 텀블러에 대한 가치는 어느 순간부터 텀블러 그 자체에 대한 가치로 바뀌어 텀블러 수집가를 양산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내게 패션이 아닌 방식으로 지구를 생각하는 문화가 정착될 수 있을까 묻는다면 나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할 것이다. 한 친구가 SNS에 환경을 생각해야 한다며 생리컵을 샀다는 게시물을 올렸는데, 나는 그의 집에 쓰지 않은 일회용품 생리대가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이를 길게 바라보면 좋은 시도라고도 할 수도 있으니 그 게시물에 일단 좋아요를 누르기로 마음먹는다. 또 다른 SNS 피드에는 비건을 위한 일회용 음식 KIT를 제작한다는 펀딩 소식이 올라왔다. 비건을 일상화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응원하고 싶지만, 이 간편식 KIT가 몇 종류의 일회용품으로 포장되어 있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그러다 문득 내 책상 위에 널브러진 포카리스웨트 캔과 두유 팩을 보고는 우선은 응원해보기로 생각을 바꾼다.





3. 서울, 머물 수도 떠날 수도 없는 곳….


  나처럼 수도권에 살며 도시 문화 속에서 아등바등 지구를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예 도시를 떠나 지방에 내려가 사는 사람도 있다. 몇 년 전에 만났던 젊은 부부의 이야기가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난다. 환경운동을 하다 결혼한 두 사람은 자급자족의 삶을 꿈꾸며 지방으로 내려갔고 했다. 전기도 물도 들어오지 않는 산속이었다. 그들에게 그 집을 물려준 사람은 두 부부보다 더 지구를 민감하게 느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터지던 날, 그 사람은 한국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몸으로 먼저 깨닫고 더 한 외지(내 기억으론 히말라야)로 떠났다고 했다. 두 부부는 물려받은 그 집에서 불을 떼서 몸을 덥히고, 나무를 깎아 도구를 만들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먹었다. 두 사람의 행색은 어떤 인공물도 허용하지 않을 것처럼 내추럴했고, 적당히 그을린 얼굴 사이로 살짝 올라온 홍조와 잘 어울렸다. 


  진심으로 멋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약간 의아한 부분이 생겼다. 우리가 만난 모임은 서울에서 열렸다. 나는 살며시 손을 들고 질문했다. “문명과 완전히 떨어진 자급자족 생활이 가능한 건가요? 두 분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오지 않으셨나요…?” 두 사람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 뒤로도 나는 SNS에서 그 부부의 행적을 간간이 발견했다. 그들은 여전히 멋진 실험을 하고 있었다. 다만 이전보다 더 유연한 방식을 택한 것처럼 보였다. 집을 꾸며 에어비앤비에 올리고 아이를 낳으며 약간의 전기기구도 들였다.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밀양 송전탑 반대 운동을 하며 만난 한 활동가는 밀양에서 자리를 잡고 생태적인 삶을 꾸려나가는 중이다. 농사를 짓고 인근 지역과 연합하여 환경운동을 벌인다. 그러나 그 활동가에게도 서울로부터 완전히 멀어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작년에 밀양 인문학 캠프를 준비하며 만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서울에 올라온다고 했다.



  지구를 생각한다면 사람이 밀집되어 있고 빠른 속도로 인해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배출해내는 서울을 떠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다. 그러나 서울을 완전히 떠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재의 조건에서 서울을 완전히 떠날 경우 사람들 간의 네트워킹에 참여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는 서울을 떠나 지방에 사는 사람에게도 서울 혹은 수도권에 사는 사람에게도 문제가 된다. 서울에 사람과 문화가 집약되어있는 만큼 곳곳에서 환경 워크샵이 열리고, 새로운 환경 기업이 재밌는 실험을 하며, 다양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물론 이 도시가 지구에 얼마나 유해한지를 피력하면서 말이다.




  딜레마는 우리를 꼼짝도 못하게 하고 비관에 빠지게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추동하는 힘이 될 수도 있다. 예술 비평가이자 사회 비평가인 존 버거는 개개인이 어떤 지향점을 향해 운동을 하다가 마주하는 욕망에 주목한다. 이 글을 마감하는 지금 나는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아이스티를 허겁지겁 마시고 있다. 마감이 코앞인 몇 개의 글과 내일 있을 세미나 준비를 하기 위해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났으므로 속이 매스꺼웠다. 당 보충이 절실했지만 이 동네에서 플라스틱 컵을 사용하지 않고 텀블러에 바로 담아주는 곳은 없었다. 내일은 오랜만에 동창을 만나러 서울에 간다. 우리는 SNS에서 친환경적인 가게를 찾아서 맛있고 예쁜 음식을 먹을 예정이다. 사소한 순간, 소박한 행동들로부터 발견되는 다양한 욕망들은 때로 삶을 고무하고 때로는 삶의 비극적인 면을 들춘다. 



모든 욕망이 다 자유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유란 하나의 욕망이 인정받고 선택되고 추구되는 과정과 경험에 다름 아니다. 욕망의 목표는 대상에 대한 소유가 결코 아니다. 욕망의 목표는 대상의 변화다. 욕망은 바라는 것이다. 바로 지금 바라는 것이다. 그 바람에의 성취가 모두 자유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는 그 바람이 지고(至高)함을 확인해 준다. ㅡ 「지금 우리가 바라는 것」(2006), 존 버거


  꽉 막힌 듯 보이는 지점에 도달했다면 그때가 바로 전환이 필요한 시점일 것이다. 배달 음식 쓰레기에 대해 걱정하면서도 밥을 해 먹을 수 없는 상황의 딜레마,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널리 뻗어나가는 환경 담론을 보며 그 가능성에 희망을 걸면서도 우려를 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의 딜레마, 쓰레기와 환경오염을 양산하는 대도시를 멀리하고 싶지만 동시에 그 네트워크의 힘이 필요한 상황의 딜레마. 우리는 이 딜레마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 딜레마적 상황을 붙들고 고뇌와 자괴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이 국면 속에서 상충하고 뒤섞이며 소음을 내는 욕망들을 직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 노력과 시도들이 곧바로 자유로 이어지진 않겠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그 바람의 지고한 가치를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