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정상가족’은 아닐 것 같아요
김지원(길드다)
결혼한 걸로 쳐주면 안 되나요
얼마 전 내 이십대를 전부 보냈던 월세 집에서 갑작스럽게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나에겐 5년 동안 함께 살고 있는 친구가 한명 있고, 개가 한 마리 있다. 친구와 나는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우리가 계속 같이 사는 편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친구는 직장인이라 전세 자금 대출이 가능했고, 나도 약간의 모아둔 돈과 빌릴 수 있는 돈이 조금 있었다. 주변 시세를 알아보니 합쳐서 전세로 가면 전에 내던 월세보다 다달이 적은 이자를 내면서도 더 좋은 조건―아파트!―에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친구가 다니는 회사는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였다. 가족경영의 각종 부작용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고용보험의 제한이 소득과 재직을 증명해야 하는 전세 자금 대출에서 어려움으로 작용했다. 우리는 ‘언제부터 국가가 이렇게 가족에 엄격했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가 장애물에 부딪힌 사이 나도 대출을 알아보았지만, 매출이 일정치 않고 불안정한 개인사업자는 대출이 쉽지 않았다. 부양가족이 있거나 결혼을 했다면 또 얘기가 달랐을 테지만 난 등본 상 부모님과 함께 사는 걸로 되어있었고, 부모님도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 친구가 가까스로 소득과 재직을 증명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대출을 받았지만, 우리가 애초에 생각했던 금액보다는 적었고, 예상했던 금리보다는 높았다. 그래도 따로 사는 것보단―혹은 10년 만에 부모님 집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 보단!―좋은 조건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우리는 주변에서 결혼한 친구들 중 두 커플이 청약에 당첨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나는 함께 사는 친구의 동생이었고, 다른 하나는 우리 둘의 절친한 친구였다. 우린 그들을 진심으로 축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괜히 씁쓸해졌다. 남자 둘에 개 한 마리긴 하지만 우리도 생활은 거의 결혼한 거나 마찬가지―돈 벌고, 세금 내고, 애 먹여 살리고….―인 3인 가족인데, “그냥 결혼하고 입양한 걸로 쳐주면 안 되냐”며 자조 섞인 농담을 던졌다.
삐거덕대는 가족주의
문탁 선생님의 신간, 『루쉰과 가족, 가족을 둘러싼 분투』가 출간 되었다. 이 책은 남산의 공부 공동체 <감이당>에서 기획한 ‘가족 강좌’ 시리즈 여섯 편의 강의를 책으로 엮은 이른바 ‘렉처 북(강의 책)’ 중 한권이다. 오이디푸스와 가족, 기생충과 가족…. 등 청년들을 대상으로 오늘날 가족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여섯 분의 선생님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문탁 선생님이 맡은 ‘루쉰과 가족’은 이 시리즈의 첫 번째 편에 해당한다. 글이 아닌 강의로 시작된 텍스트라서, 더하여 인트로 격인 강의라서, 아무래도 루쉰에 대한 집중적인 이야기보다는 오늘날 가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문탁 선생님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가족이라 부르고 떠올리는 것은 대부분 아빠 엄마, 자녀 하나 혹은 둘로 표상되는 ‘근대 핵가족’이다. 이러한 가족의 형태가 구성된 역사는 생각보다 짧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300년 정도. 이전까지의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는 오히려 국가와 같은 정치공동체, 혹은 정치·경제적인 단위로써 기능했다. 동아시아에서 ‘가家는 전통적으로 혈연 중심이 아닌, 대부*가 다스리는 공동체를 뜻했고, 서양에서도 Family는 두 혈연의 결합 뿐 아니라 이 결합에 필요한 대리자―예컨대 가노家奴―의 관리·통치의 차원에서 보다 폭넓게 다루어졌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가족이 “부모-자식-형제 같은 혈연관계를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라 특정 시대에 특정한 역할을 부여받은 사회적 제도라는 것”을 뜻한다. “가족은 철저히 역사적·사회적 단위”라는 것.
이런 변화는 서양을 시작으로 한 근대화와 경제성장, 즉 자본주의의 태동과 맞물리며 일어난다. 우리나라에서도 19세기 말부터 이 근대적 가족의 형태가 『독립신문』, 『신여성』과 같은 각종 미디어를 통해 담론화되기 시작해 20세기를 거치며 과학과 민주주의라는 이름하에 정착한다. 그리고 오늘날, 경제성장이 임계점에 도착하면서 가족형태 역시 과거와 같이 유지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결혼은커녕 연애조차하기 힘든 조건에 처한 청년들을 보라. 하지만 기묘한 것은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20세기를 거치며 만들어진 정상적인 가족의 형태에 대한 윤리적·규범적 담론이 여전히 재생산되고 있고 사회는 최근까지도 4인 가족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형태에 맞추어 구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코로나-19 에 대한 긴급 재난 지원금의 지급 형식을 예로 들 수도 있겠다. 이는 실제의 가족들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보다, 정상성이라고 일컬어지는 규범이 더 우선되는 담론의 지체현상이다. 그런 점에서 문탁 선생님의 강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여전히 견고해 보이는 이것, “혹시 가족주의는 이미 도처에서 삐거덕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현실과 유리되어 지체되고 있는 가족 담론 너머, 다음을 상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 중국 주(周)의 봉건사회에서 제후(諸侯)를 정점으로 하는 지배계층의 일원으로서 제후를 보필하여 제후국의 제사・군사・외교 등 일반 정사에 참여하였음.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강의 말미에 문탁 선생님은 2006년에 나온 박현욱의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를 언급한다. 선생님은 두 남성과 동시에 결혼한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어쩌면 폴리아모리(다자연애)적 가족 역시 가능하지 않겠냐는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나는 이 질문을 통해 얼마 전 읽은, 2020년에 발간된 따끈따끈한 신간인 김규진의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라는 에세이집을 떠올렸다. 이 책은 제목처럼 한국 국적 유부녀 레즈비언인 김규진이 그의 ‘언니’와 결혼하기까지의 사건들을 솔직담백하고 유쾌하게 풀어낸 책이다. 2006년에 발간되고 2008년에 영화화된 폴리아모리의 결혼이 픽션이었다면, 2020년에 동성결혼은 여전히 법적으로 인정되진 못하지만 KBS 뉴스에 나오는 현실이 되어있었다!
저자인 김규진은 이 글의 서두에서 나와 내 친구가 같이 살기로 결정한 이유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이 모든 일들을 벌였다. 그는 자칭 보수적 레즈비언이다. 그에게 결혼은 어떤 대의를 위한 투쟁, 혹은 담론을 생성하는 차원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다. 헤어지기 어렵게 만들기 위한 커플의 법적 구속력, 부부 결합 항공사 마일리지 적립, 신혼여행 휴가, 보험, 그리고 유산과 관련한 실용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정상적인 부부라고 여겨지는 가족의 형태가 가질 수 있는 사회적 혜택 혹은 권리를 누리고 싶다는 바람에서 시작된 일들이다.
특히 흥미롭게 느꼈던 부분―혹은 혼란스러웠던 부분―은 그가 이른바 ‘남들 다 하는 평범한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겪게 된 ‘자본주의적 친절’에 대한 이야기였다. 책에는 국가에서 반려당한 동성의 혼인 신고서에도 불구하고, 예식장에선 그들을 똑같은 소비자로 대해줬을 뿐 아니라 오히려 친절하게 맞아주었다는 감동적인(?) 정상성의 경험을 여러 차례 언급한다. 물론 김규진은 이 정상성의 경험이 “언젠가는 돈을 내는 소비자가 아니어도 겪을 수 있길 바라는 그런 정상성”이라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를 통해 근대가족을 선두에서 구성했던 자본주의가 역설적으로 핵가족 체제의 붕괴와 새로운 형태의 가족 구성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하고 적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에겐 물론 그마저도 꿈같은 일이겠지만, 정상가족의 경험을 돈만 내면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근대적 가족주의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그나마 최소한의 사회적 안전망이 되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돈으로 살 수 있는 가족의 구성 역시 반갑기만 한 일은 아닐지 모른다.
‘정상가족’은 아닐 것 같아요
전세 사건이 없었다면 ‘가족’ 혹은 ‘가족주의’에 대해 생각해볼 일이 없었을 나는, 글을 마무리하기 위해 친한 친구들 열다섯 명에게 약식으로 몇 가지 질문을 담은 설문을 보내봤다. 자신에게 가족은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가족을 구성하고 싶은지. 속속들이 도착한 답변에서 재미있었던 점은 가족에 대한 내 생각을 밝히지 않았음에도 대부분 과거 자신이 속해있던 가족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족쇄, 조별과제 같은 것, 떨쳐내고 싶은 고향…)이 많았고, 미래에 구성할 가족이 근대 핵가족의 형태가 아니라는 사실(반려동물과 함께하는 가족, 동성 가족, 친구들과 꾸리는 공동체…)을 자연스레 밝혀왔다는 점이었다. 한편으로 끼리끼리 논다고, 나와 비슷한 친구들에게만 질문을 보내서 그런가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우리 세대가 구성할 가족은 현재보다는 훨씬 더 다양한 형태가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조금 더 솔직하게 이야기해보자면 이 답변들에서 뚜렷한 어떤 일관성이나 경향성을 찾아내기는 어려웠다. 급조된 설문인 탓도 있겠지만 특히 가족의 형태에 대한 질문은 현실 가능성, 우리가 마주했던 개인적 경험들, 주변의 바람과 압박 등 다양한 조건들과 묘하게 교차되어있다. 보다 급진적으로 보이는 반려 동물과의 가족 구성이나, 동성혼의 경우에도 그것이 사람만 바뀌었을 뿐 정상 가족의 욕망을 재생산하는 배치가 있는 반면, 정상 가족의 구성에서도 훨씬 다양한 가능성에 열려있는 배치가 있을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각각이 특유한 가족의 형태를 정상성 혹은 다양성이란 단순한 기준으로 나누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때 중요한 것은 오히려 문탁 선생님이 강의 말미에 언급한 ‘그것이 어떤 형태인지보다 관계의 엮임이 더 중요하다’는 맥락의 이야기일 것이다. 4인 가족이니, 동성 결혼이니 하는 피상적인 형태는 관계의 세심함을 말해주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근대 핵가족을 넘어서는 진짜 문제는 그 형태보다도 실천적인 관계성과 연결되어있는지 모른다. 가족과 같은, 그러나 완전히 다른 어떤 엮임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근대 핵가족이 부단히 그러하는 것처럼 그것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이는 우리가 쉽게 부정하는 우리 과거의 가족주의적 경험보다 더 지난하고 어려울지도 모른다(물론 더 즐거울 수도 있다!).
그러자면 함께 사는 우리, 친구와 내 강아지 메론이와 나 또한 그저 전세로 묶인 경제적 이해뿐 아니라, 우리가 생산할 혹은 이미 생산하고 있을 다른 가치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일이다. 다양성 뿐 아니라, 그 관계의 밀도에 대해서. 우리 가족은 아무튼 ‘정상가족’은 아닐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