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발밑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할 때 :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 서평
차명식 (길드다)
어느 날, 혼자라고 느낄 때
일상에서 문득 현실감이 사라지는 순간을 경험해본 적이 있는가? 어떤 사건으로 인해 익숙했던 세상이 갑자기 멀게 느껴지고, 몸과 정신은 붕 뜬 듯하며, 당혹스러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그런 순간들. 우리는 그것을 ‘공황’의 상태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그 공황은 어떤 까닭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 답을 한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최근 길드다에서는 인본주의를 넘어선 사고 - 포스트 휴머니즘에 대한 세미나를 진행 중이다. 그 텍스트들 중 하나인 『숲은 생각한다』의 저자 에두아르도 콘은 그의 책에서 남미 에콰도르를 여행하던 중 공황 상태에 빠졌던 자신의 경험을 소개한다.
“파파약타[Papallacta 에콰도르의 지명]를 얼마 지나지 않은 곳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폭우로 인한 산사태를 맞았다. 그리고 트럭, 탱크로리, 버스, 자동차가 줄지어 있는 가운데 우리가 탄 버스는 이 상황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지만 우리 뒤편에서 계속해서 산사태가 일어나서 꼼짝달싹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급기야 우리 머리 위로 산사태의 잔해물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떤 곳에는 바위가 버스 지붕 위로 떨어졌다. 나는 공포를 느꼈다.” (에두아르도 콘, 『숲은 생각한다』 사월의 책, 87p)
처음에 그것은 폭우와 산사태에서 비롯하였다. 하지만 콘을 정녕 공황으로 몰아넣은 것은 산사태에서 비롯한 두려움 그 자체는 아니었다. 두려움에 떨던 콘은 동행하던 여행객들을 돌아보던 중 기묘한 사실을 발견한다. 자신과 달리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마치 아무런 불안감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우리가 위험에 빠졌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 나를 곤혹스럽게 만든 이들은 여행자들이었다. 이 여성들은 그저 웃거나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 일행 중 한 사람은 버스에서 내려 두세 대의 차를 지나 화물트럭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서 햄과 빵을 사가지고 와 일행을 위해 샌드위치를 만들기까지 했다.” (위의 책, 88p)
왜 저들은 아무런 불안감도 느끼지 못하는가? 지금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오직 나뿐인가? 사실 지금은 위험한 상황이 아닌 것인가? 그렇다면 왜 내 신체는 나에게 위험을 경고하고 있는가? 내 신체는 지금 현실에, 이 세계에 제대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맞는가? 나와 나의 신체는 제대로 연결되어 있는가? 어떻게 그것을 믿을 수 있는가? 쏟아지는 의문 속에서 콘은 형언할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힌다.
이러한 콘의 경험을 특수한 몇몇 사람에게만 국한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조악한 어휘로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다가 아무도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자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 아이를 생각해보자. 말 통하는 사람 하나 없는 외국에서 일행과 떨어져 길을 잃은 여행객도 있다. 평생토록 믿어온 앎과 가치가 거짓이라고 드러났을 때의 지식인들, 그리고 조직에서 어떤 사람이나 사건에 대해 자신만 홀로 다른 시선을 갖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의 우리는 또 어떠한가.
우리 각자는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에 대한 인식과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일종의 지침이 되며 두려움 없이 삶의 걸음을 뗄 수 있도록 하는 디딜 땅이 되어준다. 하지만 때때로 그 인식과 믿음은 극적으로 붕괴된다. 우리의 발밑은 무너지고, 친근했던 세계는 느닷없이 낯설어지며, 심지어 그 세계 속에서 존재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나의 신체조차도 낯선 것이 된다. 우리는 연결선이 끊어진 우주비행사처럼 미지의 공허로 내팽개쳐진다. 그것을 우리는 공황이라고 부른다.
데카르트의 접지
이러한 공황은 현대의 산물인 것만도 아니다. 특히 유럽 중세 시대의 끝자락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공황에 사로잡혔다. 알다시피 중세는 기독교의 시대였고 유일신의 시대였는데, 몇몇 대담한 이들이 그 질서에 반기를 든 순간 공황에 빠지고 만 것이다. 그들은 이전까지 신이 창조한 세계에서 신이 부여한 운명에 따라 살았고 신이 있었기에 그들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신과 결별한다면 누가 그들의 존재를 보장하는가? 나라는 사람과 이 세계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신 없이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그 때 르네 데카르트라는 사람에 의해 하나의 문장이 그들 앞에 던져졌다.
신이 없어진다면 모든 것이 불확실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 불안함을 느끼는 나. 공황에 빠져있는 나. 두려움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생각하는 그 누군가 - ‘나’는 여기에 있음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적어도 지금 나의 발밑에는 디딜 수 있는 땅이 존재하며, 여기서부터 우리는 시작할 수 있다.
이런 연유로 ‘코기토’는 서구 근대철학의 시작점이 되었다. 단 하나 확실한 존재인 나의 존재(주체)로부터 시작해 내 앞에 펼쳐진 불확실한 외부 세계(대상)를 탐사해가며 자명한 진리에 이르는 것 – 그것이 바로 근대철학의 작업이다. 서구 세계는 데카르트 이후 칸트와 헤겔을 비롯한 수많은 철학의 거장들과 함께 이 작업을 끊임없이 수정하고 보완하며 나아가왔다. 그러던 중 19세기에 이르러 한 문제아가 나타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코기토’를 향해 툭 하고 질문 하나를 던졌다.
“근데, 그거 그냥 문법가지고 한 말장난 아니냐?”
‘동사’에는 ‘주어’가 있어야 한다는 믿음. 따라서 ‘생각한다’는 동사에도 분명히 주어가 있을 것이며, 그러므로 주어 ‘나’가 존재한다는 믿음.
결국 ‘코기토 에르고 숨’을 성립하게 하는 건, 세계도 뭣도 아닌 단지 문법 법칙일 뿐이며, 그야말로 ‘말장난’이라는 것.
이 니체의 한 마디가 이후 어떤 사태로 이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더 다루지 않도록 한다. 근대철학을 뒤흔든 것이 니체 한 사람만인 것도 아니고 또 니체에게 공격당했다고 해서 근대철학이 그대로 무너져 내린 것도 아니며 헤아릴 수 없는 분량의 난해한 논쟁들이 이에 뒤따르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확실히 생각해봐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공황’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무엇으로 다시 디딜 땅을 찾는가. 접지接地하는가.
니체의 말에 따라본다면, 서구 근대 철학이 선택한 수단은 ‘문법’이었다. 그것은 다시 ‘언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언어’를 포함하는 ‘문화’, ‘사회’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에두아르도 콘은 기호학자 퍼스를 인용해 그 모든 언어, 문화, 사회적인 것을 ‘상징Symbol’의 기호라고 일컫는다.
상징은 폭주한다……분리한다.
서구 근대 철학 뿐 아니라 우리 역시도 상징을 통해 디딜 땅을 찾는다. 누군가가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상상해보자. 우선 당신은 한국어를 사용해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름은 무엇이고, 자신의 한국인이며, 누군가의 자녀이고, 어떤 집단들에 소속되어 활동하며, 어떤 이념을 가지고 있는지 등을 말하며 자신을 소개할 것이다. 물론 그 외에 다른 것들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 역시도 언어, 사회, 문화적 체계 바깥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통해 나를 정의하는 동시에 그것들을 통해 세계를 인식한다. 그 상징의 기호는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는다.
“상징적 지시는 이 지구상에서 인간만의 독특한 표상 형식이다 (...) 상징은 다른 상징과 체계적으로 연관되는 방식을 통해 대상을 간접적으로 지시한다. 상징은 규약을 수반한다.” (위의 책 63p)
위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어사전을 떠올려보면 쉽다. 어떤 외계인이 ‘개’라는 것에 대해 알기 위해 국어사전을 뒤졌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대강 이런 설명이 나올 것이다. ‘식육목 개과의 포유류로, 일반적으로 늑대와 비슷하게 생겼으며.....’ 그런데 여기서 외계인은 더욱 당혹스러워한다. 그렇다면 식육목은 무엇인가? 포유류는 무엇인가? 늑대는 무엇인가? 그래서 식육목과 포유류, 늑대를 차례로 사전에서 찾아보지만 그것들에 대한 설명에도 또 모르는 단어들이 포함되어 있다. 결국 아무리 사전을 뒤져도 모르는 단어들이 계속 이어진다.
이처럼 상징(이 경우에는 언어)은 오직 다른 상징(다른 언어)을 통해서 대상을 지시하며, 그리하여 그 상징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엮여 구성하는 외딴 섬 같은 체계(규칙, 규약)을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다. 여기서는 언어를 예로 들었지만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체계들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우리는 상징체계 안에 있을 때에는 그에 따라 세계를 인식하는데 있어 별다른 의문을 느끼지 못하지만 몇몇 경우에 자신이 상징체계 바깥에 있다고 느낄 때에는 고립감과 단절, 불안을 느낀다.
즉 우리는 평소 우리 자신을 정의하고 그에 근거해 세계를 바라보기 위해 상징적인 기호들을 사용하지만, 동시에 자신들만의 독립된 체계를 만들어내는 상징기호의 특수한 성질 탓에 때때로는 세계로부터 고립되고 단절되어 공황 상태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에두아르도 콘은 여기서 한층 더 나아간다. 콘이 보기에 공황은 상징기호에서 비롯하는 것이며, 상징기호의 특징은 자신들만의 가상적인 체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에 있다. 따라서 공황은 공허 – 무無의 공간에 떨어지는 게 아니라, 가상체계를 만들어내는 상징기호의 특성이 폭주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어떠한 계기로 인하여 독립된 체계에 – 독립된 가상세계에 빠져드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불안을 가능케 하는 상징적 사고의 구축적인 성질이다. 즉 상징적 사고가 무수한 가상세계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 공황사태 자체가 상징적 구축이 폭주하는 징후이다.” 위의 책 91p
콘은 이 폭주를 근본적인 ‘분리’라고 부른다. 곧 이 세계와 나 자신의 근본적인 분리를 의미하며, 또한 세계와 나를 연결 시켜주는 나의 ‘신체’로부터의 내 ‘정신’의 분리를 의미한다.
“폭주하는 상징적 사고는 모든 것 – 우리의 사회적 맥락,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욕망과 꿈 – 과 분리된 것으로서의 ‘우리 자신’을 경험하게 만들 수 있다. (...)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나의 존재를 의심한다.” (위의 책 92p)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다. 공황을 헤치고 나와 땅에 발 딛기 위해 우리는 데카르트가 그러했듯 다시 상징적 사고에 의지한다. 다만 이 가상세계는 한 번 닥쳐온 공황을 극복하고 나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하기 위하여 이전보다도 한층 더 나에게 익숙하고 친밀한 세계일 수 있으며 동시에 ‘우리 자신을 넘어선 세계’에서는 한층 더 멀어진 가상세계일 수 있다.
오랜 정치적 믿음이 깨뜨려지며 공황을 맛 본 이들에게는 그들을 안심시켜주는 프로파간다 유튜브 영상들이 있다. 현실의 인간관계에서 공황을 맛본 이들에게는 그저 몇 마디 문장만으로도 자기 자신을 구축하고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있다. 발달한 검색엔진과 인터넷 서비스는 나에게 가장 익숙한 상징의 체계들만을 나에게 연결시켜준다. 이러한 종류의 접지는 우리를 더욱 우리 내면의 세계로 향하여 우리 자신을 견고하게 한다. 이 때 우리는 공황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지언정, ‘우리 자신을 넘어선 세계’로부터는 한층 더 멀어진다.
간단히 말해 자기 안으로 파고들수록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정보와 맺을 수 있는 만남, 해낼 수 있는 일들은 폭은 점점 더 적어진다. 하나의 사건을 특정한 정치적 시선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게 되며,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발하는 극히 일부의 정보에만 매달리게 되고, 자신을 다시 공황으로 밀어 넣을 가능성이 있는 접촉에 대하여 극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그것은 결국 우리 스스로에 대한 감금이며, 단절을 통해 발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에 대한 상실을 의미한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종류의 접지는, 사실 공황에서 진정으로 벗어나지 못한 것일 수조차 있다.
기호의 확장이 의미하는 것
하지만 그렇다면 그 외에 공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방법이 가능하단 말인가? 상징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인가? 인류가 구축해온 언어, 문화, 사회적인 체계들 모두를 단지 허상으로 취급해 내버리자는 것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으며, 그는 애초에 가능한 일도 아니다. 콘은 분명히 말한다. 상징적 사고는 세계와 근본적으로 분리될 수 있는 조건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지만 또한 그 사고가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조건에 대한 통찰도 제공한다고. 다만 그것은 위에 언급한 방식처럼 나의 내면으로 파고들어 나 자신을 더욱 강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적인 것 너머의 더 큰 세계의 일부로 자신을 위치시키는 방식이다. 그것은 세계의 모든 것이 곧 기호작용의 산물임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한다. 위에서 우리는 상징의 기호에 대해서만 알아보았지만, 기호학자 퍼스에 따르면 기호의 세계에는 상징 외에도 다른 두 종류의 기호가 더 존재한다. 하나는 아이콘Icon이며. 다른 하나는 인덱스Index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아이콘은 유사성의 기호이다. 아이콘은 그것이 가리키는 사물과 유사성을 공유하다. 나무를 가리키기 위해 그린 나무 그림이 아이콘의 예시라 할 수 있다. 한편 인덱스는 가리키는 사물과 직접적으로 유사성을 공유하지는 않지만 그것에 영향을 받거나 그것과 상관관계에 있는 기호를 의미한다. 뜨거움과 차가움을 표시하는 온도계의 눈금이나 오고감을 표시하는 신호등의 불빛 등이 인덱스에 해당하며, 때문에 인덱스는 지표성의 기호로 불린다. 그리고 마지막이 상징Symbol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상징은 오직 다른 상징과 연관되는 방식으로 대상을 간접적으로 가리키는 기호이다.
이 중 상징은 인간의 전유물이지만 아이콘과 인덱스는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가령 나뭇잎을 흉내 내는 곤충들은 아이콘적 기호에 해당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앉아! 라는 명령에 주저앉는 개는, 그것을 언어적인 측면에서 완벽히 이해한 건 아니지만 그 높낮이의 소리가 들렸을 때 특정한 행동을 취해야 함을 이해하는 것이므로 역시 그것을 인덱스적 기호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자, 이쯤에서 하나의 상상을 시작하자. 이역만리 외국에 내던져진 자신을 생각해보자. 나는 그곳의 상징적 체계들, 즉 언어와 사회와 문화에 대한 어떠한 사전 지식도 없는 상태이며, 그리하여 공황에 빠지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하지만 그래서 실제 그런 상황에 처한 모든 이들이 공황에 빠진 채 침몰하던가? 그렇지 않다. 우선은 말을 배우는 것부터 시작한다. 저번에 저들은 우유를 보고 ‘◎◎’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술을 보고 ‘◎◎’라고 말한다. 둘 다, 마시는 것이라는 점에서 비슷한 것들을 보고 ‘◎◎’라고 말한 것이다. (유사성의 기호, 아이콘적 사고) 그렇다면 ‘◎◎’라는 소리는 음료를 가리키는 것이다. (지표성의 기호, 인덱스적 사고) 이런 식으로는 우리는 그들의 닫힌 언어 체계 – 상징체계에 진입하며 그들의 언어 체계를 익혀나간다. 문화 체계도 마찬가지다. 특정상황에 취하는 특정한 행동들의 유사성을 통해, 그것이 가리키는 것을 도출해내고 거기서부터 그 체계를 파악해나간다.
이런 점에서 상징의 체계는 비록 상징끼리의 연관 관계를 통해서만 서로를 지시하지만, 아이콘적 기호와 인덱스적 기호들에서 비롯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다시 말하면 자신들의 전유물인 상징체계를 통해 스스로를 세계와 구분 지었던 인간 또한 실은 여전히 아이콘과 인덱스 기호로 이루어진 자연 세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결국 기호로 이루어진 거대한 세계의 일부임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세계를 향해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귀환의 장소
이 모든 말들이 결국 상투적인 표상으로 들릴 수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아마도 이 지면에서 콘의 이야기를 조악한 수준으로 밖에 풀어낼 수 없었던 나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우리의 사고를 상징적 사고에서 다시 인덱스적 사고와 아이콘적 사고까지 확장해 나감으로써 우리의 ‘우리 자신을 넘어선 세계’로 귀환하고 그 땅에 내려앉을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 앞에 놓인 사건들과 우리가 접하는 타자들을 상징적 사고 그 이상의 방식으로 바라보기 시작할 때, 우리의 내면의 세계는 중대한 변화를 맞을 수 있다.
콘은 그 힘을 통해 아마존의 우림과 마주하고 오직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인간적인 사고를 넘어서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려 한다. 우리는 비록 콘과 같이 아마존으로 향하지는 못하더라도 지금 이곳 우리의 삶 속에서 장소를 발견할 수 있다. 정말 단순하고 거칠게 표현하자면, 컴퓨터 앞에 앉아 치열한 논리의 전쟁으로 어떤 사안의 정당성을 논하는 것과 밖으로 나가 그 사안의 당사자들을 대면하고 그들과 말을 나누며 그 현장의 공기를 감각하면서 그것을 체험하는 것(울려퍼지는 고함, 피부를 흔드는 감정의 파동, 충혈 되고 땀에 젖은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 그 모든 것에 반응하는 나의 신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신체성, 현장성, 그 외 많은 단어들로 표현되는 그 차이는 단순히 상투적인 수사가 아니라 결국 실존하는 확장된 기호의 사고를 가리키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우리를 공황으로부터 귀환토록 하는 힘이다. 우리는, 보다 넓은 대지 위에 내려앉아야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를 위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