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비거니즘 : 인간중심주의 넘기

김고은 (길드다)








* ‘채식’은 식습관의 맥락에서, ‘비건’과 ‘비거니즘’은 사회운동의 맥락에서 사용하였다.



성다영이 쏘아올린 작은 공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채식을 하는 이들은 피부병이나 체질상의 문제냐는 질문을 듣곤 했다. 요즘 비건이라는 이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면 촌스럽고 문화에 뒤처진 사람 취급을 받을 게 분명하다. 비거니즘은 우리 또래 사이에서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당대성을 중시하고 구체적인 삶에 질문을 던지는 창비의 잡지 『문학3』이 2020년 2월호 <주목> 코너(이후 『문학3』)에서 “동물의 자리에서 인간중심주의 다시 보기”를 주제로 삼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문학3』에 실린 다섯 개의 글 중 두 번째 글 「생명 하나 생명 둘 생명 셋」은 시인 성다영의 비거니즘 에세이다. 그는 함께 사는 강아지에서 시작해 채식과 가까워진 계기를 경유하여 사람들이 모두 비건을 하길 바란다는 소망을 밝히고 있다.




   필자가 시인이기 때문일까? 글은 선언적이고 함축적이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날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이유로 인간을 채식주의자라고 선언하는 문장은 비약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문화를 무시한 채 본투비 인간의 습성을 찾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에게 화식(火食)이 오래된 관습이 아니라는 ―정설로 치부되는― 가설을 간단하게 패스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인간이 불 쓰는데 처음부터 능통했다면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이 신에게서 불을 가져오는 일을 그토록 험난하게 그리지도, 상징적인 사건으로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글은 재밌다. 내용이 재미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 글이 독자에게 어떤 효과를 발생시킨다는 점이 흥미롭다는 뜻이다. 얼마 전 <길드다 강학원>에서 『문학3』를 함께 읽었다. 친구들은 성다영의 글에 대해 뚜렷하게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성다영의 글이 감상적이라며 불편했다고 말했고, 어떤 사람들은 감정적인 그의 말투로부터 혼난다는 느낌을 받고 각성했다고 말했다. 





고기로 손이 가지 않는다

성다영의 바람과 별개로, 이 글에서 비건을 해야 하는 논리적인 이유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그 글을 통해 그가 비건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그의 삶에 비거니즘이 어떤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

평소에 퀴어와 페미니즘 이론에 관심이 많던 나는 우연히 캐럴 제이 애덤스의 『육식의 성정치』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책의 서문을 읽던 중에 나는 비건이 되기로 결심했다. 동물이 겪는 폭력의 일부가 몸으로 바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부였지만 나를 바꾸어놓기에 충분했다. (「생명 하나 생명 둘 생명 셋」, 성다영)




   몇 달 전 한 세미나에서 『고기로 태어나서』를 읽었다. 그간 공장식 축산의 세계를 공부할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나는 잔인한 장면에 대한 묘사를 가능한 보거나 읽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왔다. 미루다 미루다 만나게 된 『고기로 태어나서』의 살상-살육 장면 역시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책을 읽은 뒤로 달걀후라이를 보면 닭들이 좁고 가파른 케이지에서 서 있기 위해 동료를 바닥에 짓밟고 있는 모습이 펼쳐진다. 구운 삽겹살을 보면 저자가 영리한 돼지를 이동시키기 위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욕설과 폭력을 휘두르던 모습이 떠오른다.

   나처럼 유독 살상 장면 보기를 힘들어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성다영의 말에 공감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몸 쓰는 일을 하느라 매주 고기를 먹어야 기운을 차리는 아빠도 영화 <옥자>를 보고는 한동안 고기 먹기를 망설였다. 공장식 축산의 실태를 보고 나면 비건에 관한 정교한 논리를 세우지 않더라도 먼저 손과 입이 움직이기를 거부한다. 성다영의 글은 비건이 신체적인 경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한다. 





비거니즘과 페미니즘

그러나 성다영은 단순히 축산동물의 삶을 떠올리며 고기 먹기를 꺼리게 된 것은 아니다. 그녀는 페미니스트로서 육식을 거부한다. 많은 경우 채식 문제와 페미니즘 문제는 같은 선상에서 논의된다. 『문학3』의 첫 번째 글인 채효정의 「‘사람-되기’와 ‘동물-되기’」에서 우리는 그에 대한 명확하고 논리적인 설명을 찾을 수 있다. 

“동물은 결여의 존재로 표상된다. 동물은 이성이 없고, 말을 못하며, 법과 윤리와 도덕이 없다. 그래서 그것들은 정치도 없다. ‘그것들’은 이름 없는 자들을 부르는 말이었고, 사람이 덜된 존재를 부르는 말이었다. 여자들과 아이들과 원주민들과 노예들과 짐승들이 그렇게 불렸다.”(「‘사람-되기’와 ‘동물-되기’」, 채효정)




   ‘인간(Man)’이란 이성에 기반해 합리성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정의되어왔다. 그러나 이 고전적인 ‘인간’에 대한 상(像)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특정한 견해일 따름이다. ‘인간’의 반대편엔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존재들이 있다. 이성과 합리성이 없고, 그것을 무한히 확장 시킬 능력도 부족한 동물은 이 사회에서 주체가 될 수 없다. ‘인간’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사회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존재에는 동물뿐만 아니라, 여성, 난민, 비정규직 노동자도 포함된다. 이들은 모두 보편이라고 생각했던 능력과 권리가 없는 존재, 가장 최종적인 피착취자, 정치적 최약자들, 무권리자, ‘짐승’이라고 불리는 존재다. 이것이 채식과 페미니즘의 공통된 출발선이다.

   성다영은 본인이 여성이라는 ‘짐승’으로 살아온 나날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물이라는 ‘짐승’의 고통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하고 공감했다.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짐승’이 되기 때문에 다른 ‘짐승’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다. 즉 이질적으로 느껴졌던 존재들이 나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타자와 연대할 수 있게 된다. 맹자의 말마따나 나와 다른 존재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능력이자, 또 이질적이고 개별적인 존재들을 사회로 불러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즉 보편적 규범에서 벗어나 테두리 바깥에 있는 이 존재야말로 착취로부터의 해방을 가능케 하는 존재인 셈이다.





“그럼 식물은?”

친구 B는 비건은 아니었지만, 늘어난 비건 친구들을 통해 한국에서 채식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 많이 들은 것 같았다. 실제로 채식을 하면 영양소를 고루 섭취하기 어렵다거나, 채식 식단은 맛이 없다거나, 채식하는 사람들은 까탈스럽다는 편견은 아직도 널리 통용되고 있다. B는 말했다. “비건하는 사람들에게 심지어는 이렇게까지 말하더라니까. ‘그럼 식물은 어쩌고?’ 이 얼마나 이상한 말이야.” 나는 비거니즘이 얼토당토 않은 비판을 받고 있다는 B의 입장에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말을 듣고 적잖게 당황했다. 당시에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만약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그럼 식물은 어쩌고?”라고 물을 것이다. 정확하게는 “이 생태계는? 이 우주는 어쩌고?”라고 묻고 싶다.

   육식이 가져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채식을 선택하는 것은 물론 수고로운 일이고, 또 그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채식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비거니즘의 유행과 가축의 삶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을 때 나는 곧 세간의 관심이 식물에까지 확장될 것이라 생각했다. 유전자 조작, 종자의 협소화, 종자회사의 계략에 의해 농약으로 병들어가는 토지를 빼놓고 인간과 동물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그러나 B와 그 친구들에 따르면 공장식 축산과 채식은 다른 존재가 건드릴 수 없는 성역처럼 느껴졌다. 식물마저도 동물만큼은 중대한 사안이 아니었다. 오히려 식물에 관한 논의는 동물에 관한 논의를 방해할 수도 있다 여기는 것 같았다. 




   ‘인간’이 소중한 만큼 동물도 소중하다는, ‘인간’이 보호받는 만큼 동물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논리로부터 동물은 ‘인간’과 동등한 지위를 획득한다. 비거니즘은 고통에 대한 공감을 통해 ‘인간’을 넘어서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동물에게 ‘인간’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행위는 ‘인간’의 범주를 넓힐 뿐이다. 동물을, 식물을, 여성을, 난민을 다시금 ‘인간’으로 포섭하는 건 어떤 문제도 해결해주지 않는다. 우월성을 가진 존재가 있다면 언제나 우월성에 밀리는 ‘짐승’이 생겨난다. 우리는 보다 더 근원적으로 ‘인간’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지위를 검토해야 한다. ‘인간’의 규범을 깨고 우리가 ‘인간’ 너머의 감각을 가질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 사유하기

오히려 내가 궁금한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첫째, 동물을 의인화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을까? ‘퀴어’는 정상으로 보이지 않는 기괴한 사람들을 일컫던 말이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퀴어’는 존재를 긍정하고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정상성에 대한 위협이 되었다. ‘짐승’인 동물 역시 그 존재 자체가 가장 무서운 무기이자 가능성일 수 있다. 그렇다면 ‘퀴어’와 같은 방식으로 동물을 의인화하지 않고 동물의 이질성을 바라보고 드러낼 수 있지 않을까?




   둘째, 이질적인 존재의 범위를 조금 더 넓혀볼 수 있을 것이다. 동양고전을 읽다 보면 낯선 감각을 마주하게 된다.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고, 서로 먹고 먹히며 순환하는 감각을 나는 모른다. 저절로 알이 맺히는 곡물과 성장하는 동물, 흐르는 물과 이동하는 공기, 지고 뜨는 해와 달과 무언가를 주고받는 법을 나는 모른다. 인간중심주의는 자연의 흐름으로부터 인간을 따로 떼어놓아 견고한 지위를 주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여성과 동물, 이주노동자를 ‘인간’으로 포섭하기보단 우리 스스로가 자연과 화합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페미니즘과 마찬가지로 동물의 고통을 공감하는 일은 이질적인 존재 간의 연대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인간’을 기준으로 이질적인 존재들을 포획한다면 인간중심주의를 강화할 수 있다. 인간중심주의에 갇히지 않으면서 동물들의 삶이나 우리가 동물을 먹는 일을 사유할 수 있는 시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