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24시간 이후

김지원 (길드다)





24시간

    어느 날 스마트폰에 푸시알림이 울렸다. ‘OOO님이 스토리에서 회원님을 언급했습니다.’ 인스타그램 푸시알림은 언제나 묘한 떨림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인스타그램 메시지 서비스는 내가 메시지를 읽으면 상대방에게 ‘읽음’이라는 표시가 뜨기 때문에, 알림이 있어도 나는 일부러 약간의 텀을 두고 열어보는 편이다.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 싫어서. 어김없이 약간의 텀을 두고 열어본 메시지는 그러나 그닥 설레는 내용은 아니었다.
    “#n번방_가입자_전원_신상공개” 


    이것은 ‘n번방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뒤 스토리에서 돌고 있는 일종의 ‘챌린지’*였다. 이 챌린지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의 게시물 링크를 걸고, 다시 세 명의 친구들을 언급하는 식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 메시지는 해시태그 문장 그대로였다. 나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챌린지에 참여해 다른 세 명의 친구들을 언급하며 이 운동의 확산을 돕거나, 아니면 무시하거나. 24시간이면 사라지는 인스타그램 스토리의 특성상, 시간이 많지 않았다. 
    ‘어떡하지?’
    스토리를 읽은 그 순간부터 이후 24시간 동안 일상생활이 멈추었다. 현장에서 작업자들에게 지시를 하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퇴근 후 읽어야 할 책을 눈앞에 펼쳐 놓고서도, 나는 계속해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인스타그램을 열고 닫고를 반복하며, 이 챌린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n번방이라는 끔찍한 사건에 분노하는 마음을 가지면서도, 쉬이 챌린지에 참여할 수 없었던 것은 사건의 복잡성에 비하여 메시지가 너무 단순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참여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으면 될 것을 계속해서 안절부절 못했던 것은 이 선택이 많은 사람들에게 SNS 상에서 나를 판단하는 하나의 척도가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난 결국 24시간을 지나쳐버렸다.

* 2014년 여름에 시작된 이른바 ‘아이스버킷챌린지(ALS)’운동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급격히 퍼져나가 하나의 유행이 되었다. 이후 ‘챌린지’는 어떤 목적과 당위를 가지고 소셜 미디어 상에서 벌어지는 확산 운동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 



괴물

    나는 우선 언론을 비롯한 각종 미디어에서 이 사건이 다뤄지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악마, 괴물…. 내 생각에 n번방은 괴물 같은 몇몇 범죄자들이 만들어낸 예외적이고 특수한 사건이기보다, 기본적으로 남성 중심적 사회가 그동안 묵과해온 수많은 사건들이 누적되어 만들어진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것을 예견한 신호들은 도처에 있었다. 나를 비롯한 나의 학창시절 남자친구들의 언행에, 나의 아버지의 습관에,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우린 오랜 세월 여성을 대상화하고, 그들을 농 삼는 문화에 일조해 왔다. 성 구매와 착취가 당연한 듯 이루어졌고, 그것을 자랑하거나 떠벌리는 행위를 통해 남성들 간 의리와 우정을 쌓아왔다. n번방과 같은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때, 우리가 우리 사이에 버젓이 존재했던 이런 뿌리 깊은 여성 혐오적 문화를 없었던 것처럼 취급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괴물 같은 개인은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다. 반드시 괴물을 가능케 한 사회가 있다. 그러나 언론은 이들 피의자 개인들을 악마화함으로써, 그러한 조건들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일찍이 나치스SS 전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취재한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 속 악행은, “광신자나 반사회성 인격 장애자들이 아니라, 국가에 순응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보통이라고 여기게 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범죄의 특수한 양상을 무시한 채 모든 문제를 남성 중심적 사회의 문제로만 취급한다면 그 역시 오류일 것이다. n번방의 발발은 남성 중심적인 사회뿐 아니라 변화하는 미디어와 기술 환경이 아주 큰 몫을 차지한다―범죄 자체, 이 사건에 대한 인식, 이 사건에 의해 촉발된 운동에서도―이 범죄는 미디어 상에서 그 대상을 찾으며, 새로운 형식의 욕망과 연결될 때에만 성립된다. 가해자는 피해자에 대해 일종의 ‘감독’처럼 행세하며, 이 범죄의 결과물을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유통, 거래함으로써 금전적 이득을 취한다. 범죄의 이러한 측면들은, 이 전과는 다른,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또 다른 조건들이다. 나는 이러한 조건들을 살펴봄으로써 이 ‘괴물적 범죄’가 특정 개인이나 성별에 의해서일 뿐 아니라 더 복잡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신상공개’는 지금껏 쌓여온 분노를 반영한 합당한 구호이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목적지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24시간은 지났지만, 뒤늦게나마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어디인가를 찾아보려고 한다. 



기록체계 2000

    매체이론가인 프리드리히 키틀러는 1986년 그의 책에서 “매체가 우리의 상황을 결정한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휴머니스트들로부터 ‘기술결정론자’라는 비난을 받으며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 문장은 말 그대로 역사에 있어서 개별 인간의 의지나 거대한 역사적 흐름 이전에, 매체가 인간의 상황을 결정하는 주요한 조건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는 이보다 조금 앞선 저작 『기록체계 1800/ 1900』에서 1800년대를 문학 기록체계의 시대, 그리고 1900년대를 축음기, 영화, 타자기와 같은 아날로그 기록체계의 시대라 정의한다. 그에게 기록체계, 즉 매체가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조건이 단순히 인간의 의사전달의 표현수단이 아니라, 우리의 사유와 존재 방식을 결정하는 메커니즘을 구성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기록체계 1900의 주요한 매체 중 하나인 축음기는 그에 따르면 우리의 청각적 인식을 새롭게 발견하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 축음기에 녹음된 음성을 들으며 우리는 우리 입에서 나오는 소리 외에 수많은 소리들이 존재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우리가 이 중에서 선택적으로 듣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키틀러는 『축음기, 영화, 타자기』에서 이러한 백색소음의 발견으로부터 정신분석학적 무의식의 출현을 연결 짓고 있다. 


    그는 이 책의 말미에 기록체계 1900의 종합으로써 컴퓨터에 대해 언급한다. 양차 세계대전을 위해 개발된 암호 생성 기계 콜로서스**의 IF-THEN명령어는 이제 인간의 명령을 수행하는 기계가 아닌, 인간에게 명령하는 기계가 된다. 키틀러 사후 10년***, 매체는 그 이전 100년 동안의 변화보다 어쩌면 더 급격한 변화를 이루었다. 그런 지금 우리가 ‘기록체계 2000’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컴퓨터의 IF-THEN 보다 훨씬 더 복잡한 명령을 가능케 하는 스마트폰-네트워크의 기록체계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스마트폰과 온라인상의 광범위한 네트워크는 축음기의 등장이 그러했듯 인간 주체의 지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우리가 실시간으로 접속하는 온라인 세계에서 더 이상 대상의 실재, 혹은 실제의 여부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광범위한 네트워크는 역설적으로 익명화 된, 고립된 개인을 만든다. 이러한 개인들의 욕망은 이제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관심attention을 향한다. 플랫폼과 대기업 역시 관심을 부추기고 충족시키고 종속시키는 방식으로 경제를 구성하며, 정치, 문화 전반으로 이러한 형식이 퍼져나간다.
    n번방이라는 엽기적이고 특유해 보이는 범죄 역시 그 대상을 이러한 관심경제attention economy에서 찾는다. ‘일탈계’****와 같은 대상의 익명화된 관심욕망으로부터 신상을 볼모로 동영상을 제작하고, 그 잡히지 않는 대상을 카메라라는 실제의 세계에 가둠으로써 사유화私有化한다. 감금과 폭행, 절도와 착취는 더 이상 실제의 세계에서 벌어질 이유가 없다(혹은 실제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범죄 또한 온라인의 세계에서와 동일한 논리적 맥락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사유화된 대상은 손쉽게 플랫폼을 통해 유통되고, 가상화폐를 통해 거래된다. 그리고 이 거래는 개인 간 거래를 넘어, 일종의 네트워크를 구성한다. 기존의 남성중심주의적 사회가 여성 혹은 여성이라는 실제 경험을 공유해왔다면, 여기선 여성―아동―이라는 추상, 혹은 비물질적 상품을 공유한다. 그런데 이러한 범죄의 양상이 너무나도 잔인하고, 끔찍하고, 특유해 보이는 것에 비하여 범죄가 욕망과 이익 충족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들, 혹은 그 메커니즘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들이다. 지난 10년간 우리가 정확히 인지하지 못했을 뿐, 우리 모두가 이 매체적 변화의 파도에 휩쓸려왔다.

* 프리드리히 키틀러, 『축음기, 영화, 타자기』, 7p.
** “꿀벌은 탄환이고, 인간은 원격 조정 무기이다. 꿀벌에게 춤은 방향과 거리에 대한 객관적 데이터를, 인간에게 명령은 자유로운 복종을 건네준다. 따라서 IF-THEN 명령어를 가진 컴퓨터는 인간 주체이다. 브레츨리 파크의 진공관-괴물 이래로 전자공학은 담론을 대체하고, 프로그래밍 가능성은 자유로운 복종을 대체한다.” 같은 책, 455p.
*** 그가 사망한 2011년 이후 전 세계적으로 페이스북을 비롯한 SNS 플랫폼이 급격한 속도로 활성화 되었다.
**** ‘일탈계정’의 약어. SNS상에서 익명으로 일탈적 일상을 업로드 하는 계정. ‘n번방’은 ‘일탈계’를, ‘박사방’은 스폰서 아르바이트를 미끼로 범죄의 대상을 찾았다고 알려져 있다.


 
공공성 없는 공론장

    따라서 이는 범죄의 양상에서 뿐 아니라 이 범죄를 인지하고 반응하는 우리의 상황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언론의 보도와 소셜 미디어 상의 담론이 상황의 복잡함에 비하여 단순화 될 수밖에 없는 이유 역시 이러한 매체적 조건으로부터 비롯된다. 관심을 표적으로 하는 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 혹은 윤리적 사유의 여부가 아니라 오직 스펙터클이기 때문이다. 조회수가 돈이 되면 언론은 우리가 흔히 목격할 수 있듯이 자극적인 이미지를 제시하고 표제 짓기를 할 뿐이다. 여기엔 독자의 해석의 여지가 부재한다. 강력한 ‘밈’*을 형성하고, 그것이 유통, 전파되도록 하면 그만이다. n번방 뿐 아니라 조국 사태, 윤미향·정의연 사태…. 등을 비롯해 최근에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정치적 쟁점들이 이와 같은 원리로, 놀랍도록 비슷한 양상을 띠고 전개된다. 


    독일의 영상작가이자 비평가인 히토 슈타이얼은 이를 매체적 조건의 변화에 따른 ‘공공성 없는 공론장’의 등장이라 설명한다. “공공성 없는 공론장은 …우리를 이 세상의 가능한 모든 것들과 실시간으로 직접 접속시키지만, 이 연결의 속도와 형식을 정해준다. 그것은 즉각적인 효과, 호기심의 전율, 또는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자만심에 기반을 둔다. …그 언어 속에서 사물들이 예외적이고, 재난적이고, 중심을 벗어난 것처럼 작동할수록, 그 밖의 모든 것들은 그만큼 더 예전 그대로 유지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 우리 자신의 SNS 피드, 혹은 우리가 크롬, 사파리, 인터넷을 접속했을 때 나타나는 포털의 피드를 대입해볼 수도 있다. 전자에서 우리는 팔로워들의 그 다채로운 이미지들 속에서 어떤 불편함도 발견하지 못한다―우리는 결벽을 가진 성실한 청소부, 혹은 면역력을 상실한 음압실의 격리환자가 된다. 후자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기상천외한 예외적, 재난적 상황들이 업데이트되는 화면 아래로 예외 없이 ‘문재앙’과 ‘미통닭’을 외치는 댓글들을 만난다. 전통적인 공론장의 역할은 위르겐 하버마스에 따르면 비판과 비평, 즉 차이를 통해 방향을 수정하는 기능을 요구*** 받는데 반해 현대적 공론장은 동일성을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유지된다. 이것이 2020년임에도 여성혐오가 “그만큼 더 예전 그대로 유지될 수 있”는 이유다. 동일성의 재생산은 거름이 되어 기존의 땅―그것이 개별적인 것이건 사회적인 것이건 간―에 깊게 뿌리내린 낡은 정서가 자라기에 더없이 적합한 토양을 형성한다.
    이제 공론장의 구조를 유유히 떠돌아다닐 수 있는 유일한 메시지는 광고이거나, 충분히 확산성을 가진 강력한 이미지―혹은 이미지적인 언어뿐인 듯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 모든 체계, 기록체계 2000이 의미하는 바는 어쩌면 사유의 부재인지도 모르겠다. 사유가 부재하는 자극과 반응의 체계.

*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에 등장하는 개념으로, 유전자처럼 개체의 기억에 저장되거나 다른 개체의 기억으로 복제될 수 있는 비유전적 문화요소 또는 문화의 전달단위를 말한다.
** 히토 슈타이얼, 『진실의 색』, 239p.
*** 위르겐 하버마스, 『공론장의 구조』.



성찰적 정치화

    그러나 몇 주 째 미국을 뜨겁게 한 ‘조지 플로이드’ 사건 #blacklivesmatter, 그것의 계기가 된 8분 46초의 동영상*은 명백히 위와 같은 매체적 조건 없이는 성립할 수 없었다. 동일한 맥락에서 n번방과 관련한 해시태그 운동은 그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 단순성 덕분에 분명한 효과를 보여주었다. 26만의 다수성에 대항하는 270만이라는 더 엄청난 숫자, 그동안의 지속적인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사법체계를 압박해 이루어낸 작지만 발 빠른 변화들 말이다. 물론,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정치적 문제 상황들은 언제나 이렇게 명확한 메시지로 압축, 변환되지 않으며, 그보다 지난하고 복잡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n번방 역시 이런 종류의 운동성 위에서는 해결되지 못할 문제들을 여전히 떠안고 있다. 270만 이후, 법제화 이후의 문제들. 어떻게 지난하고,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들에도 반응 할 뿐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은 여전히 미로 속에 갇힌다.


    그런데 이러한 매체적 조건의 양가성을 지적하며 히토 슈타이얼은 ‘성찰적 정치화’라는, 다소 뜬금없고 의미심장한 단어를 꺼낸다. 그는 이와 같은 사건에 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새로운 양상의 네트워크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네트워크들에서 ‘프라이버시’는 아마 과거 페미니즘의 구호였던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의 반향을 보여주는 새로운 기능을 수행한다.”고, “정동의 영역들을 피해가지 않고, 성찰적으로 정치화하는 것”**이 우리가 지금 처한 과제라고. 어쩌면 ‘공공성 없는 공론장’에 대한 그의 분석은 한편으로 이 비관적 현실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그 속에서 한 줌의 희망을 잡아보려는 이들에 대한 확인사살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다시 살펴보자. 다른 한편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알고 있는 ‘운동’, ‘실천’, ‘사유’와 ‘공론장’과 같은, 새로운 매체시대 속에서 어쩌면 이미 추상이 되어버린 이러한 언어들 전반을 폐기해버리지 않은 채, 끈질기게 그것들을 재검토하기를 촉구한다. ‘공공성 없는 공론장’ 혹은 ‘사적 공론장’이 본래 그 자체로 용어상 모순이라는 점을 고백하면서도, 그가 이 모순을 특징으로 하는 공론장의 새로운 형태를 이야기하는 이유. 그것은 오히려 너무 쉽게 과거를 낭만화하거나 미래를 비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처한 조건들로부터 시작해야한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며칠 전 밀양 송전탑 행정대집행 6주기 온라인 집회가 있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그리운 밀양의 얼굴들을 ‘ZOOM’을 통해 만났다. 100명의 연대자들이 동시접속해서 열린 화상 집회는 난리도 아니었다. 음소거를 하라는데 듣지도 않고, 사회자가 진행하는데 누구네 애기는 울고, 영상은 끊기고…. 분명 가만히 앉아 있는데 현장에 있는 것보다 배는 힘들었다. 한시간을 넘긴 집회의 와중에 제대로 알아들은 말은 채 열 마디도 안 된다. 그래도 화면으로 본 밀양의 할매들은 표정이 좋았다. 송전탑이 서고 6년이 지나는 동안 밀양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 주민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평생을 이웃으로 살던 친구들이 합의를 하면서 공동체가 무너졌고, 대책위 내부에서도 이런저런 인간관계의 문제가 끊이지 않았다. 그게 우리가 뉴스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지난함 속에서도 웃는 얼굴들이 있었다. 전에는 이런 식으로 본 적은 없었던, 얼굴만 모여 있는 화면을 보니, 더 그랬다. 


    나는 어쩌면 정동의 영역을 피해가지 않는 것은, 성찰적 정치화라는 것은, 결국 이런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밀양을 ‘님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얼굴들을 보여주는 것, 비관적 현실이나 낙관적 전망의 단일한 일상은 없다는 사실을 들려주는 것, 그리고 때론 우릴 완전히 고립시키는 매체가, 때론 얼마나 우릴 가깝게 만들 수 있는지 알려주는 것. 양차 세계대전에서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에 사용되었던 사진기와 영사기가 베트남 전쟁에서 그것을 막는 데에 기능했던 것처럼, 이 기계의 다른 가능성들을 상상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8분 46초’와 ‘신상공개’ 그 이후를 준비하는 것.
    조금만 덧붙이자면, 신상공개와 포기라는 양자택일에 갇히지 않는 것, 그리고 24시간 혹은 다양한 종류의 정동적 압력에 어떻게든 응답하고자 하는 것. 이 글이, 그런 하나의 응답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 “동영상 기반의 미디어 정치는 …자원을 확보한 기득권의 몫이었다. …그러나 모두가 스마트폰만 있으면 영상을 촬영하고 전송하고 배포할 수 있게 된 시대가 되면서, …그리고 플로이드 영상이 온 인터넷을 휩쓸면서, 그동안 미디어에서 집요하게 왜곡되고 지워졌던 미국 내 흑인들의 현실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 히토 슈타이얼, 『진실의 색』, 241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