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력함을 무릅쓰기

김지원B





* 글쓴이 김지원은 대안학교를 졸업한 후에, 여행하고 사진을 찍고 창작물을 내는 활동을 이어나가는 중이다. 지인의 추천으로 길드다를 알게 되었고, 세미나에 참여하게 되었다. 현재는 이탈리아 여행 필름사진집 독립 출판을 앞두고 있다.



    “무능력한 숙명성을 윤리적 응답이 대신한다.”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을 거의 다 읽었을 때쯤 눈에 들어온 문장이었다. 책이 어려웠던 만큼 문장이 쑥 마음에 들어온 건 낯설기도 하고 반가운 경험이기도 했다. 나에게는 이 문장이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문장으로 이해되었다. 위베르만의 손에 들어온 네 장의 사진은, 사진 그 자체가 가진 무능력한 숙명성이 분명히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모든 것을 무릅쓰고 탄생한 사진의 요구, 살펴보고 검토해달라는 부름에 윤리적인 고민과 함께 다가간다. 







무능력한 숙명성

    내가 자주 “어쩔 수 없지.” 라고 얘기하곤 하던 주제가 있다. 바로 육식에 관해서이다. 그리고 덧붙여 “나는 그래도 이 고기가 얼만큼 고통스럽게 살았는지 웬만큼 아는 편이야” 로 생각이 전개되곤 했다. 모르고 먹는 사람이 훨씬 많을 텐데, 그런 부류보다 내가 훨씬 낫고 나는 고기의 삶을 알고, 유통 과정을 안다고 근거도 없이 오만하게 생각했다. 그러던 중에 닭, 돼지, 개 농장에 대한 노동 르포르타주 <고기로 태어나서>를 읽은 뒤 내가 가졌던 생각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해본 일들이 농장에서 자행되고 있었고, 동물들은 착취  당하며 삶이라고 볼 수 없는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읽는 중간에는 아주 몰입해서 한숨을 푹 쉬기도 하고 울음이 받쳐 눈물이 나기도 했다. 책을 단숨에 읽고 나는 고기와 아주 가까워진 것 같으면서도 완전히 멀어져버린 기분이 들었다.


    책 <고기로 태어나서>를 읽기 전으로 돌아가 보자. 재난지원금 카드가 집에 도착한 어느 날 저녁, 밤 늦게 모인 우리 가족은 그 카드를 가지고 고기를 배 터지게 먹어보자며 정육식당에 갔었다. 식당의 구조는 1층은 고기를 살 수 있는 정육점이고, 2층은 구입한 고기를 바로 구워먹을 수 있게끔 불판이 준비되어있는 방식의 식당이었다. 1층에는 정육점 특유의 붉은 조명이 그 공간을 위협적으로 휘어잡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돼지는 몸 통째로 한 쪽에 걸려있었고, 포장된 고기는 진열대에 가지런히 있었다. 엄마가 나를 부르며 뭘로 먹을까, 물어보는데 나는 진열대 쪽으로 가고 싶지 않았고 나가고만 싶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분명히 죄책감과 함께 불편한 감정을 느꼈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 그런 감정을 외면하고 고기를 고르는 모순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모순은 2층의 상황으로 이어졌다. 불판에서 익어가는 고기를 보는데 불편한 감정을 지울 수 없었다. 연민 같은 것이었다. 나는 곧이어 불편한 감정이 연민으로 이어지고, 내가 연민만을 베풀고자 한다는 사실에 대해 괴로워했다. 실망스러우면서도 내가 어떤 방식으로 사고해야 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아주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고기를 씹으면서 그런 생각이 툭툭 끊겨버렸다.

“도시에서 물건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음식은 농장에서 생산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농장이 무엇인지, 어떤 종류의 농장이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농사짓는데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분명 농장이 계속해서 생산할 것이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지만, 그것을 어렵게 하는 장애물이 무엇이고 어느 정도인지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음식이란 식품점 선반이나 식탁 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알지도 못하고 상상해 볼 수도 없는 상당히 추상적인 개념이다.” 웬델 베리, <책임감 있게 먹는다는 것> 






윤리적 응답

    접시에 올려진 음식이, 음식 속의 고기가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죽어야 했는지를 알기는 어렵지 않지만 절대 쉽지도 않다. <고기로 태어나서>를 읽고 알게 된 몇 가지 사실들의 나열이다. 상품으로 적합하지 않은 병아리들은 선별되어 자루 속에서 사람의 발에 밟혀 죽고, 살아남았다 해도 곧 거대한 은색 원통 안에서 회오리형 칼날에 갈려 폐기된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수퇘지들은 오직 육질을 위해 마취도 없이 거세를 당하고, 육질이 질겨지기 전에 도축 당한다. 개는 비좁은 케이지 안에서 녹이 쓴 거칠고 날카로운 캔에 주는 썩은 음식물 쓰레기를 먹다가 장염에 걸려 죽는다. 
    과정에 대한 방식적인 공부는 물론 필요하겠지만 단순히 정보만 안다면 그 너머의 변화는 없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어떤 방식으로 사고해야 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모르겠는 까마득한 길에 덩그러니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나는 그런 것을 상상해 볼 여지도 주지 않는 구조 속에서 많은 것들을, 특히 중요한 것을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외면했다는 걸 실감했다.

“알기 원하는 자에게, 그리고 특히 ‘방식을 알기’ 원하는 자에게 지식은 기적도, 휴식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것은 ‘끝없는 지식’이다. 사건에 대한 끝없는 접근이지, 드러난 확실함 속에서 사건을 포획하는 것이 아니다.”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 134쪽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의 텍스트가 그런 까마득한 마음을 가진 나를 조금씩 나를 이해시켜주었다. 인용문을 읽고 실마리를 얻었다. ‘포획’과 ‘접근’은 대상을 알기 위해, 혹은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주 완전히 다른 방식이다. 그리고 ‘접근’의 방식을 취해야 오만한 주체로서의 무분별한 행동을 줄일 수 있게 된다. 옳은 방식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2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 번째 조건은 먼저 이기적으로 지배하려는 마음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다. 이기적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것은 전유하려는 것과 같은데 전유는 유연하게 작동될 수 있는 상상력을 초장에 제거해버린다. 다음 조건은 오만한 방식의 상상하기를 경계하는 것이다. 잘못된 상상은 오히려 현상을 소외시키고, 위축시킨다. 상상한다는 것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므로 당사자의 자리를 부당하게 차지하는 것과 헷갈리면 안 된다.

    네 장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사진을 손에 쥐게 된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은 그 사진들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깊이 고민한다. 저자는 이미지들과 거리를 취한 채로 사진을 바라보면서 그 사진들을 물리쳐서도 안 되고, 우리가 그 곳에 있다고 믿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위베르만은 이렇게 조심스럽게, 동시에 치열하게 접근할 때, 2가지 변화가 생긴다고 말한다. 먼저 바라보아진 대상은 주체로부터 “내가 그것에게서 아직 한 번도 알지 못했던” 외양을 띄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바라보는 주체의 정체성은 변질된다.
    그 중 첫 번째 변화가 나에게도 생겼다. 이제 고기는 더 이상 내가 원래 알았던, 무의식적으로 답습해오던 이미지의 모습을 띠지 않는다. 붉고, 윤기나고, 탐스러운 고기의 환상은 먹는 고기로 길러지는 동물의 비극적인 삶과 부드러운 육질만을 좇는 인간의 잔인함으로 대체되었다.

“쇼아의 이미지를 연구하는 것은 “멀어져 가는 그 이미지 앞에서 희망을 다시 품는 척하는”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무릅쓰고’, 현상의 접근 불가능성을 무릅쓰고 고집스럽게 접근하는 것이다. 그것은 추상화 속에서 스스로를 위로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무릅쓰고’, 현상의 복합성을 무릅쓰고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어떻게’의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무릅쓴 이미지들>, 240쪽


    얼마 전부터 나는 고기를 조금씩 가려먹게 되었다. 먹고 싶은 음식에 고기가 필요한지, 내 앞의 음식에 고기가 들어갔는지를 따지게 되었고, 내가 고기를 먹은 횟수를 기억하고 세게 되었다. 거의 모든 끼니에서 고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고, 새삼 나의 고기 소비량이 필요 이상으로 많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위베르만이 언급한 두 번째 변화는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면 정육식당에서 내가 느낀 혼란으로 뒤섞인 감정의 모순은 무엇이었을까. 붉은 빛 조명과 갈고리에 돼지 몸통이 걸려있던 공간이 공포감을 느낄 만큼 무척 구체적이었다. 나는 공포감 속에서 고기를 골랐고, 불판 위에서 얌전히 익어가는 고기를 보며 연민을 가졌다. 당시에는 내가 느낀 모순적인 감정에 진저리가나고 동시에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웠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것은 ‘어떻게’의 연속이다. 동물들의 삶에 오만하지 않은 방식으로 접근하고자 노력하고, 만들어진 환상이나 추상성 속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자 하는 것이다. 말랑한 말이지만 이것보다 더 단단한 결론을 내려 보기엔 아직 나는 너무나 설익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해보고자 하는 것은 모순을 끌어안는 태도이며, 여기에는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한 실천이다.